최태복과 유학생 강제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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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현재 한국인 해외 유학생 수는 세계 3위권으로 알려졌습니다. 해외에서 대한민국에 유학하는 학생도 9만 1천여 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해외파견 유학생은 고작 2백 명 안팎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에서 있었던 유학생 강제 귀국 사건과, 사건의 중심에 섰던 노동당 비서 최태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1990년대 초까지 북한은 과학기술과 군사발전을 위해 동유럽과 중국에 유학생들을 많이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로 유학생들의 집단망명이 꼬리를 잇자 당시 중앙당 교육담당 비서였던 최태복이 직접 소련에 가서 유학생들을 강제로 귀국시켰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사실이지만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공산이념의 모순과 경제난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했습니다. 70여 년간 사회주의를 유지하던 소련의 붕괴와 함께 동유럽 사회주의도 잇달아 붕괴되었습니다.

1985년 3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오른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위임연설에서 개방, 정보공개,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전면적인 개혁을 암시했습니다. 중앙집권제에 반대하는 소련 인민들의 요구에 공산당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7년 소련공산당은 일명 '페레스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개혁 초기 내부적 혼란이 극심해지자 1991년 8월 소련공산당 보수파 세력들이 기존의 사회주의를 재건하려는 목적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 군사정변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인민들의 저항과 군인들의 거센 반발로 3일 만에 저지되었고 소련공산당의 해체를 불러왔습니다. 결국 여러 연방 국가들로 이루어졌던 소련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국가들로 완전히 분해되었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과정에서 독일은 하나로 통일되었고 김일성과 특별한 우정을 쌓았던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권력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다 아내 엘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1989년 12월 25일 인민의 이름으로 처형되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는 그곳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북한의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고위급 간부자녀들인 북한의 유학생들 속에서도 개인숭배에 기초해 인민을 탄압하는 독재자 김일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레닌그라드종합대학에 다니던 한 유학생은 대사관 담당보위원의 강제귀국 위협에 맞서 당당하게 망명을 선포했습니다. 당황한 김일성은 즉각 그의 어머니를 비행기에 태워 현지까지 보내면서 자식을 설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네가 선택한 길을 포기하지 말라. 만약 네가 지금 나의 설득을 듣고 귀국한다고 해도 반역자로 처단될 터이니 이 에미는 걱정하지 말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기절하였습니다.

1989년과 1990년 사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유학하던 수십 명의 북한 학생들이 한국과 서방국가에로 망명을 선포했습니다. 바빠 맞은 김정일은 1990년 가을 당시 노동당 중앙위 교육담당 비서였던 최태복을 급히 소련에 파견하였습니다.

유학생들의 대량적인 망명을 막으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소련에 도착한 최태복은 대사관에 유학생들을 다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해외에 파견된 유학생들에게 휴가를 줄 데 대한 장군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고 유혹했습니다.

해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에게 금강산도 돌아보고 편히 쉬다가 다시 공부하도록 김정일이 배려를 베풀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어 김정일이 비행기까지 보내니 시간을 어기지 말고 제때에 귀국해야 한다는 당부까지 전했습니다.

1930년 12월 1일 남포시에서 태어난 최태복은 만경대혁명학원 졸업생이었습니다. 최태복 역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분단된 동독의 '칼마르크스대학', 오늘날 라이프치히종합대학을 졸업한 북한의 1세대 유학파 출신이었습니다.

'칼마르크스대학'을 졸업한 최태복은 1959년에 노동당 교육부 지도원으로 임명된 후 1978년에는 김책공업대학 학장으로, 1986년부터는 당중앙위원회 교육비서로, 현재는 중앙당 정치국 위원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학생들이 선배 유학생인 최태복의 말을 그대로 믿었고 공부하던 책과 지어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도 남긴 채 귀국하였습니다. 김정일의 하수인 최태복을 시켜 어떤 짓을 꾸몄고 이 길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임을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최태복의 말을 듣고 머리를 기웃거리면서 반신반의 하던 유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김정일의 귀국명령을 거부하고 탈북의 길을 택했고 지금은 대한민국 정부와 대기업의 중요 직책에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탈북하면서 한국을 택하지 않은 일부 유학생들도 다른 나라들에 망명하여 현재 박사나 교수로 명망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운명을 의심하지 않은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김정일이 보낸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조국이라고 찾아 온 유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최태복이 약속한 금강산이 아닌 국가보위부의 무시무시한 철창이었습니다. 귀국한 첫날부터 유학생들은 국가보위부에 의해 인민문화궁전에 구금된 상태에서 강력한 사상검토를 받게 되었습니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3개월 동안 진행된 사상투쟁은 가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당시에 그 유학생들 속에는 저와 대학 2학년까지 함께 공부했던 동창생 김충일도 있었습니다.

김충일의 아버지는 함경남도 어느 시골마을의 교장이었습니다.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공부도 잘하고 마음도 어진 모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최태복이 대사관에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갔고 조국에 휴가를 간다는 소리에 6년 동안 공부하던 책들을 모두 그대로 둔 채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사상투쟁 과정에서 졸업을 앞둔 그가 귀국을 준비하느라 웽그리아(헝가리)를 거쳐 오지리에 몇 번 장사를 다닌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 때문에 혹독한 조사를 받았으나 다행히 용서를 받고 경공업과학원 합성화학연구소에 배치됐습니다.

사상투쟁기간에 많은 유학생들이 정치범관리소에 끌려갔습니다. 용서 받은 몇 명은 그나마 무사하리라 생각했는데 귀국하고 사상검토를 받은 지 1년이 다 돼가던 1991년 여름 김충일 역시 끝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염광훈, 이영수를 비롯한 저의 많은 유학생 친구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영원히 살아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독재자 김정일은 숱한 돈을 들여 키운 아까운 인재들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유학생활을 하던 학생들뿐이 아니었습니다. 1992년에는 이미 유학생활을 끝낸 '푸른제 명칭 군사학교' 졸업생 수백명을 농촌으로 추방하고 그들 중 60여 명을 정치범수용소에 끌어갔습니다. 군 고위직에 있던 30여 명은 처형됐습니다.

수용소에 끌려간 유학생의 가족들은 농촌으로 추방됐습니다. 제 고모부를 처형해 세상이 경악할 희대의 살인 만행을 저지른 김정은의 반인륜적 범죄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는 1990년대 초 유학생 사건을 통해서 쉽게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아직도 당시의 사건을 떠 올리는 북한의 간부들은 손자벌이나 되는 독재자 김정은에게 아부하며 살아가는 극악한 간신 최태복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가 김정일의 본심을 유학생들에게 알려만 주어도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학생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자신도 국제담담 비서였던 황장엽 선생처럼 망명의 길에 올랐다면 최태복은 아마 노벨평화상을 수여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조국이 통일되는 그날 최태복과 같은 인간도살자들은 독재자 김정은과 함께 준엄한 인민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