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유학생, 당에서 학교 과목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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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형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여러분들도 가족이나 친척 중에 유학을 다녀 온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설령 유학을 다녀온 분이 없다고 해도 유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학은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뜻으로 북한의 일반주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김정은도 스위스 유학생 출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 유학생들의 생활과 그들이 자본주의 매력에 빠지면서 겪는 고민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외국의 대학들에 가면 남한에서 온 유학생들과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이 종종 마주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유학생들은 자신들을 '조선유학생'이라고도 자칭합니다. 2010년 유네스코의 기록에 따르면 세계 각국에 있는 북한유학생 수가 약 3천여 명이었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중국에서 공부했는데 인원은 9백여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 115명, 인도에 168명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과 같은 서방자본주의 나라들에도 북한 유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010년 유네스코 조사 자료에는 자본주의 적대국가라고 하는 미국에 56명, 캐나다에 288명, 영국에 34명, 프랑스에 170명, 호주에는 무려 736명씩이나 북한의 학생들이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외부세계에는 잘 알려져 있지만 김정은도 스위스 베른의 공립중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김정은의 배다른 형인 김정남과 친형인 김정철, 동생인 김여정도 모두 같은 학교에서 유학생활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정일은 유학생활을 통해 자녀들이 다양한 지식과 발전하는 세계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고위간부들도 더 좋은 장래를 위해 자식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선택적이긴 하지만 북한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일반 주민의 자녀들도 외국에서 교육받도록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학생들은 주로 과학 분야를 전공하는데 발전한 자본주의 현실을 접하고 나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재능이 인정된 일반 주민의 자녀들은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에 유학을 보내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로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통제가 가능한 나라에 유학을 보냅니다. 하지만 특권층 자녀들은 다릅니다.

고위특권층 자녀들은 평시에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살았고 귀국해도 부모 덕에 보장되는 권력세습이 있어 망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고위급 간부 자녀들은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들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 북한 일반주민들이 모르는 현실입니다.

2013년 12월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했습니다. 장성택의 측근들인 리영하 당행정부 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 장성택의 매부(매형)인 전영진 쿠바 대사, 조카인 장용철 말레이시아 대사, 박관철 스웨리에 대사도 처형되고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당시 다른 나라에 유학을 하던 장성택의 조카들, 측근들의 자녀들도 북한으로 끌려가 가족들과 함께 정치범관리소에 갇혀야 했습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나라에 유학을 하는 고위층 자녀들이라 해도 항상 북한당국의 감시 속에 살아야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2014년 12월 14일 파리 라 빌레트 건축학교에 다니던 유학생 한 모 씨가 해외에 파견된 북한 보위 부 요원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연행되어 가던 중 탈출하여 보름 동안 행적을 찾지 못한 사실까지 있었습니다.

한 씨의 가족들은 장성택 측근으로 가족이 정치범관리소에 끌려갔습니다. 자신도 북한에 끌려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니던 학교는 프랑스에서 최고 수준으로 북한 고위층 자녀들 10명이 유학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위층 간부 자녀들을 위주로 선진국들에 유학생들을 파견하지만 광복 후까지만 해도 북한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전우의 자녀들을 위주로 실력이 우수한 일반인들의 자녀들도 토대가 나쁘지 않으면 유학생으로 추천했습니다.

1946년부터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유학생들을 파견하였으며 전쟁기간에는 부모 없는 고아들도 외국에 보내서 돌보도록 했습니다. 유학비는 전적으로 북한 당국이 부담하거나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다나니 북한의 유학생 정책은 어디까지나 당에서 검증한 대상들만 선택하여 보내는 제한성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남한이나 다른 나라의 학생들은 교환학생, 장학생이 아니면 가족들이 학비를 보장하는 방법으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유학대상자 선정과정부터 노동당이 주관하기 때문에 외국의 학교선택, 과목지망도 철저히 당에서 결정합니다. 유학생이 있는 가정은 해외에 나갈 수 없고 해외에서 생활하는 유학생들끼리도 서로 상대를 감시해야 합니다.

유학생들의 생활은 해외 대사관들에 파견된 국가안전보위부 담당요원들이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도청과 미행, 주말보고 등 엄청난 통제가 뒤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유학생들의 망명과 탈출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첫 유학생 망명사건은 1958년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있었습니다. 이때 8명의 유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망명했습니다. 김일성은 1955년 12월 남조선 노동당 출신 박헌영과 이승엽을 간첩혐의를 씌워 처형했습니다.

1956년 8월엔 중국 공산당 출신의 연안파 간부들과 허가위와 같은 소련 공산당 출신 간부들을 숙청했습니다. 소련의 흐르시초프 정권을 수정주의로 규정한 김일성은 1957년 소련대사였던 리상조를 수정주의자로 몰아 해임 철직시켰습니다.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조선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소련국립영화대학에 다니던 유학생 허웅배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허웅배는 소련주재 북한대사관에 구금되었습니다.

그러나 허웅배는 대사관 위생(화장)실 창문을 뜯고 도망쳐 의과대학에서 유학생활 중이던 애인 최선옥까지 데리고 소련에 망명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이 북한 유학생들을 같은 사회주의 체제였던 동유럽 국가들로 망명하는 사태를 몰고 왔습니다.

남은 유학생들도 소련파가 종파로 숙청된 북한에 귀국하면 안전이 담보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집단으로 망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급해 맞은 김일성 정권은 1959년 여름방학에 2천여 명의 유학생 모두를 강제로 귀국시켰습니다.

귀국한 유학생들은 약 1개월 정도 사상검증을 받았고 검증 후 다시 대학에 돌아온 유학생은 4분의 1도 안되었습니다. 나머지 유학생들은 1958년 북한에 처음으로 생겨난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거나 종파로 낙인찍혀 처형됐습니다.

1962년 8월에는 불가리아에서 이장직을 비롯한 북한유학생 4명이 '6.25전쟁은 김일성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북한이 말하는 체코식 경제개발계획은 허구다', '김일성 선집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북한은 김일성 개인숭배를 주민들에게 강요하면서 한동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유학생들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김일성의 동유럽 방문을 계기로 북한은 다시 사회주의 나라들에 유학생들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외 사회주의 국가들에 다시 유학생들을 파견했지만 그로 인한 잡음은 북한내부에서 끊이질 않았습니다. 1989년 2월 체스코(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조승군과 김은철이 망명했고 같은 해 5월에는 폴란드 유학생 동영준과 김운학이 망명했습니다.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기 직전이었던 1990년 7월에는 우크라이나공화국 하리코프 대학에서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북한에서 살기 싫다고 선언하며 유학생활을 하던 김지일이 망명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붕괴를 맞으며 유학생들의 망명이 줄을 잇자 중앙당 교육비서 최태복이 직접 모스크바를 찾았습니다. 최태복은 보름 동안 조국에서 금강산 구경도 하고 휴식을 하다가 복귀하자고 해외에 파견된 유학생들을 꼬드겼습니다.

최태복이 책임지고 북한은 1989년 12월부터 1990년 초 사이에 모든 유학생들을 송환시켜 인민문화궁전에서 3개월동안 사상투쟁 회의를 진행하고 수많은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끌어갔습니다.

유학파 출신인 김정은이 고위층자녀들을 해외유학생으로 많이 파견하고 있지만 부질없는 짓입니다. 북한 유학생들이 다른 나라의 길거리를 거닐 때 김일성, 김정일 초상휘장(배지)을 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에 제노라(내로라)하는 북한 고위급 간부의 자녀들조차 남한의 평범한 유학생들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북한 유학생들의 비참한 처지입니다.

유학생활을 했다는 김정은 정권이 개혁개방을 외면하고 파쇼적 독재유지를 위해 북한의 발전을 가로막으려 한다면 대단한 오판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유롭고 개방된 해외에서 진실을 배운 북한의 유학생들이 하나로 뭉쳐 김정은 정권의 파괴를 앞당기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