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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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이제 며칠 후면 인민군 원수였던 리을설의 사망 1주년이 됩니다.

리을설은 항일빨치산시절 김일성의 전령병 출신으로 해방 후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김씨 일가의 경호를 맡아 온 인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5년 11월 7일에 빨치산 출신인 인민군 원수 리을설은 폐암으로 94세의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북한에서 김부자의 건강장수를 위하여 2천여 명의 전문가들이 만수무강연구를 진행하였으나 김일성은 82살에, 김정일은 69살에 세상을 마감하였습니다. 리을설 마저 죽고 나니 이제 남은 빨치산 출신은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인 황순희뿐입니다.

북한은 지난해 리을설의 시신을 옮기는데 장갑차를 동원했습니다. 시신 운구에 장갑차까지 동원된 것은 1995년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과 2010년 조명록 전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이어 리을설이 세 번째로 북한에서 최고의 예우였습니다.

리을설의 시신을 실은 장갑차가 오토바이의 호위를 받으며 평양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성산 혁명열사릉으로 향했고 김정은이 직접 무덤에 흙을 뿌렸습니다. 김정은은 리을설의 장례를 5일간의 국장으로 치르도록 지시했습니다.

리을설은 1921년 9월 14일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37년 여름 리을설이 지양개 등판에서 일제에게 부모를 잃은 김익현, 김철만, 조명선을 비롯한 20여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입대했다고 밝혔습니다.

리을설은 김일성의 련(연)락병으로 활동하였는데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18권에 '몸소 적기가를 부르시며'라는 제목으로 1938년 말부터 1939년 초까지의 '100일 행군', 이른바 빨치산 시절 '고난의 행군'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30일 노동신문에 그의 회상기 전문을 싣고 리을설이 "난관을 과감히 이겨내며 오늘의 고난의 행군을 빛나게 결속하고 주체혁명위업을 기어이 이룩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리을설의 수령결사옹위 모범을 따라 배워 이 땅위에 통일되고 부강 번영하는 백두산대국을 반드시 일떠세워야 한다며 그가 지녔던 충실성과 혁명적 신념을 따라 배워 김정은을 결사옹위하자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과 달리 리을설은 해방 전 나이가 어려 빨치산 대원들 중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만한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리을설은 김일성을 따라 소련국경을 넘어가 극동군 제88저격여단에서 복무하다가 24살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리을설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에 제4사단 참모장으로 승진했고 1951년에 제15사단 3연대 연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사단장과 군단장, 호위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1996년부터 2004년까지는 호위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몇 명 남지 않은 빨치산 출신들을 내세우면서 리을설을 크게 신임했습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자신과 뜻을 같이해 온 빨치산 출신들의 건강을 염려해 담당간호사와 안마사까지 붙여주었습니다.

일부 언론들은 빨치산 출신들 중에서 여자문제에 가장 깨끗한 사람을 리을설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습니다. 리을설은 빨치산 출신들 가운데서 간호사와 안마사를 제일 많이 갈아치운 색정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손녀 같은 여성들을 너무도 괴롭힌다는 사실이 김일성에게까지 보고 된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여성문제는 복잡하지만 리을설의 충성심을 따를 사람은 없다"며 그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할 정도로 아끼고 신임했습니다.

사실 아무리 빨치산 출신이라 해도 리을설 만큼 김일성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리을설은 빨치산 시절 김일성이 등에 업고 다닐 정도로 극진히 사랑해준 어린 부하였고 김일성의 호위임무와 연락임무를 겸임해 맡았던 전령병이었습니다.

저는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연구하던 만수무강연구소 만청산연구원에서 생활할 때 부터 여러 차례 리을설을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개인적인 만남이 아니라 항일빨치산 참가자들과의 상봉모임, 특별강연 등을 통해서였습니다.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리을설은 인민군 차수였습니다. 당시 오진우를 비롯해 쟁쟁한 빨치산 출신들이 몇 명 생존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리을설은 기억력이 좋아서인지 특별 강연이나 정치 강연과 같은 외부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1992년 설을 보내고 첫 출근을 했을 때 만수무강연구소 연구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리을설이 출연하는 강연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을설은 패기가 넘쳐 있었고 김일성의 이름을 부를 땐 반드시 위대한 수령님이라는 존칭어를 붙였습니다.

당시까지 리을설의 강연은 다른 간부들이 출연하는 강연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1995년 리을설은 차수에서 원수로 승진하고 다음해인 1996년부터는 호위사령부 사령관으로 출세해 김정일을 직접 호위하는 총대를 이어받았습니다.

리을설이 호위사령관으로 출세한 시기 저는 만청산연구원에서 억울하게 쫓겨나 지방의 행정공무원으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활하던 지방의 한 병원에 운전사로 생활하고 있는 리을설의 조카가 있었습니다.

리을설이 호위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한국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북한에 소 1천마리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정주영 회장은 '포장마차' 상표의 라면과 금강산 텔레비죤 1만대, 제주도산 미역과 '하나로'라는 상표의 담배까지 지원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대북 지원물자 가운데 환자 이송용 구급차 석대도 있었는데 그중 한 대는 평양산원에, 다른 한 대는 소위 김정일의 고향이라는 양강도 삼지연군 인민병원에 보내졌고 나머지 한 대는 리을설의 조카가 있는 지방의 병원에 차례졌습니다.

구급차 증정식을 하는 자리에 리을설이 참가해 지방의 간부들과 담화를 가졌는데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몹시 놀라게 했던 건 호위사령관이 된 리을설이 사망한 김일성의 이름을 부를 때 절대로 존칭어를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방의 간부로 처음 그런 담화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달라진 태도를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평양에서부터 리을설의 강연을 많이 들어 온 저에겐 충격이 컸습니다. 리을설은 사망한 김일성을 마치 친구였던 듯이 존칭어를 빼고 이름으로만 불렀습니다.

리을설의 이런 달라진 태도를 김정일이 모를 리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포정치로 권력을 대물림하는 일가라 해도 김일성부터 김정일, 그리고 오늘날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북한에서 절대로 손을 보지 못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첫 사람은 호위사령관입니다. 북한에서 한번 호위사령관은 영원한 호위사령관입니다. 호위사령관은 워낙 다른 범죄에 가담할 만큼 여유가 없지만 설령 자식들이 큰 죄를 짓는다 해도 대부분 처벌을 피해가게 됩니다.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하지만 언제 총부리를 돌릴지도 모르는 권력을 호위사령관이 틀어 쥔 만큼 절대로 손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권력이 손보지 못하는 또 다른 한사람은 중앙당 부장급 대우를 받는 김일성 일가의 전용 이발사입니다.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했지만 자신의 이발사와 호위사령관은 절대로 손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면 설령 손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후임자들도 자신들이 언제든 숙청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을설의 담화 내용에서 밝힌 충격적인 이야기도 많은데 오늘은 시간 관계로 여기서 마치려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또 이어갈까 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