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저는 유학파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반란사건과 그 내막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설립 70돌을 앞둔 지난해 9월 27일 김정은은 이 대학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보낸 서한 '주체혁명의 새 시대 김일성종합대학의 기본임무에 대하여'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이 지나온 길을 높이 평가하며 화려하게 포장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1990년대 전후로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공부하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유학생들이 북한의 다른 대학 유학생들과 함께 평양으로 강제 귀국되었던 사실과 그 결과에 대하여 전해드리려 합니다. 종합대학 창립 70돌을 맞으며 교직원 학생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정은은 "김일성종합대학은 명실공히 수령님과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태어나고 장성, 강화되어온 김일성, 김정일의 대학"이라고 역설했지만 실상은 그와 정 반대였습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 사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스탈린 우상화를 배격하는 운동이 거세지자 모스크바와 베를린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도 김일성 우상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조국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사건으로 하여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김일성은 해외에 유학생들을 파견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이 다시 해외에 유학생들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5월 김일성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한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유학생들에게도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당시 북한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해마다 6백명 정도씩 유학생을 선발했는데 그 중의 절반 이상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었습니다. 겉보기엔 평온했지만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는 사실상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한 사람들이 유학생들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1988년 김일성종합대학 투서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북한이 아직도 국가전복 모의로 평가하고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투서사건은 김정일에게 보내는 익명의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었습니다. 투서에서 학생들은 노예왕국인 김정일 족벌체제를 비난하면서 북한의 민주화를 요구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주도하였던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생들은 국가보위부의 수사에 걸려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소련과 독일, 웽그리아(헝가리) 등 동유럽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유학 중이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유학생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당시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많은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매일같이 시위를 하며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저항했습니다. 놀랍게도 사회주의에 저항하는 시위의 맨 앞장에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유학생들도 서있었습니다. 당시 레닌그라드대학교,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한 유학생은 아버지 김일성에서 아들 김정일로 권력을 넘기는 봉건적 세습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북한의 파쇼화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북한 사회에 만연한 간신들의 아첨행위가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며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가인 소크라테스의 명언 "사냥꾼은 개로 토끼를 잡지만 아첨쟁이는 칭찬으로 우둔한 자를 사냥한다" 말을 인용하며 북한을 비난했습니다. 또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는 명언을 인용하며 노동당 간부들을 간신으로 비난했는데 그 이유로 모스크바에 있던 북한대사관 담당보위원에게 불려가서 사실 확인 조서까지 써야 했습니다.
대사관 서기관인 보위원이 "귀국준비를 하라"는 말에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 챈 그는 정치적 망명을 결심하였고 국제경찰인 인터폴에 도움을 요청 했습니다. 급해 맞은 당시의 소련대사 손성필은 이 사실을 김정일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김정일 정권은 그 학생의 어머니를 소련까지 끌고 갔습니다. 국제형사기구 인터폴이 가족의 면허를 허용한다는 점을 악용해 아들을 설득하여 무조건 귀국시키라는 지시를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 내렸습니다.
북한은 어머니를 보는 아들의 마음이 약해져서 동요할 수 있다고 어리석은 타산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모자의 상봉은 북한이 의도한대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겨우 이루어진 상봉에서 어머니는 단호했습니다. 그 유학생의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조국에 가면 너는 용서가 아니라 처형될 수밖에 없으니 다 산 이 엄마를 생각하지 말고 네 결심을 끝까지 굽히지 말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긴 후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인터폴의 도움으로 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애인과 함께 통일된 독일로 망명을 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가족들까지 끌어들여 유학생들의 귀국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은 동유럽에서 공부하던 북한의 대학생들을 크게 긴장시켰습니다. 통일된 독일정부가 북한 출신 유학생들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옛 동부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북한출신 유학생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동부독일에서 유학하던 여러 명의 여성들이 통일된 독일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이때가 1991년,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진지 불과 몇 달도 안 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들의 망명에 이어 소련과 다른 동유럽 나라들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도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현대판 봉건왕조"라고 외치며 속속 망명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미 망명한 대학생들 말고도 소련과 뽈스까(폴란드) 등 여러 나라 대학들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서광', '민주주의 학교'를 비롯하여 비밀독서회를 만들고 북한에서 독재 체제를 허물기 위한 토론을 활발히 벌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북한의 보위부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훗날 이들이 몰래 가진 토론이 많이 알려졌는데 "사회주의는 자유로부터의 후퇴이며,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사회주의는 한갓 노예왕족 정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노동당 과학교육비서였던 최태복을 모스크바로 파견했고 북한도 마치 동유럽사회주의 붕괴를 받아들이고 개혁개방의 길을 물색하는 것처럼 유도했습니다. 지어 개혁개방과 민주화에 유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호도했습니다.
또 유학생들에게 "조국을 방문해 휴가도 보내고 국가의 앞날도 논해보자"는 김정일의 지시까지 설명하며 귀국을 유도했습니다. 동유럽의 붕괴를 경험한 많은 유학생들이 북한도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밖에 길이 없다며 김정일의 꼬임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김정일이 파놓은 죽음의 함정이라는 것을 이들은 몰랐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철도대학, 함흥수리대학, 청진금속단과대학 등에서 동유럽으로 공부하러 떠났던 유학생 수백 명이 귀국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평양의 아늑한 호텔이 아니라 국가안전보위부의 무서운 철창이었습니다. 이들은 전부 당과 국가를 배신했다는 누명을 쓰고 정치범수용소에 구속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유학생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들이 외치던 민주화의 목소리는 아직도 남아 언제인가 북한에서 자유의 큰 불씨가 되어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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