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풍산개종견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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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까지 저는 아미산총국 산하 김형권군 광덕풍산개종견장의 역사와 풍산개 종견장이 파괴되던 과정에 대해 전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시간을 빌려 북한에서도 순수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풍산개가 오늘날 이곳 대한민국에서 순혈종을 유지, 보존하면서 우량종의 개체수를 계속 늘여나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드리려 합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 드렸듯이 1990년대 중반부터 겪었던 '고난의 행군'으로 하여 북한은 풍산개의 우량종들을 거의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지구상에서 풍산개의 존재가 사라졌나 했는데 여기 대한민국에 와보니 풍산개는 흔한 품종이었습니다. 오히려 풍산개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연구는 대한민국에서 더 활발했고 풍산개 목장들도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해 한국에 도착하고 보니 풍산개는 저보다 먼저 탈북해 이미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저는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김정일이 풍산개 한 쌍을 선물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선물로 받은 풍산개 한 쌍이 한국에서 키우게 된 첫 풍산개인 줄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풍산개는 김정일이 선물을 하기 전에 벌써 한국에서 많이 키우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북한의 '노동신문'은 미국 사냥개 품종과 싸워 이긴 풍산개 '수라'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이 개를 영웅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1980년대 북한 당국이 만든 기록영화(다큐) '동물들의 싸움'에서는 풍산개들이 무리를 지어 2백kg이나 되는 큰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북한의 주민들은 풍산개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풍산개는 오히려 북한보다 중국에서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언론들과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출판하는 '연변일보'와 '연변청년' 등 신문과 잡지들은 1980년대부터 풍산개에 대해 널리 소개하며 그 존재의 가치를 소개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는 북·중 사이에 밀수가 가장 왕성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애견인들 사이에서 우량종 풍산개에 대한 수효가 높았는데 풍산개의 우량종 새끼 한 마리의 가격이 중국 인민폐로 1천 위안을 부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중국에 있는 가족, 친척들을 방문하는 북한의 사사여행자들과 중국에서 북한을 드나드는 장사꾼들은 거액을 부르며 풍산개를 수소문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여태껏 그 존재에 관심도 없던 북한 주민들도 풍산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풍산개의 원종은 북한의 경제가 불안해지기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국경을 통해 몰래 중국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풍산개의 새끼는 8호 안전부에서 경비를 서는 김형권군 광덕풍산개종견장이 아니면 얻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광덕풍산개종견장에서 키우던 풍산개의 종자가 어떻게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외부로 새어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내용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현지 종견장의 간부들과 경비병들이 서로가 협조해야만 종자를 빼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수꾼들을 통해 중국에 반입된 풍산개들은 애견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영리함에 있어서 어떤 품종도 따라 올수 없었고 한번 정한 목표는 절대 놓치지 않는데다 자기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풍산개의 몸값은 천정부지였다고 합니다. 풍산개가 한창 밀수되던 1990년대 중국의 사냥꾼들과 애견인들 사이에서는 "풍산개 세 마리만 있으면 호랑이를 만나도 무섭지 않다"는 이야기가 당당하게 흘러 나왔을 정도였다고 하니 청취자 여러분들도 그 인기를 실감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중형견으로 몸집은 작지만 용감하고 민첩한 풍산개의 인기는 중국을 통해 대한민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고 풍산개를 반입하기 위한 노력도 활발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광덕풍산개종견장에는 300여 마리가 넘는 풍산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직원들이 몰래 빼내 밀수꾼들에게 팔아넘기기까지 하면서 제가 광덕풍산개종견장을 두 번째로 찾았던 1998년에 풍산개는 잡종견까지 다 합쳐서 겨우 21마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밀수꾼들에 의해 중국으로 넘겨진 풍산개들의 실체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여러 언론들에서 보도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풍산개의 원종이 중국을 거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 온 해가 1993입니다. 1993년 11월 6일자 한국의 '동아일보' 29면에는 "북한명견 풍산개 한국에 온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북한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명견 풍산개가 암수를 다 합쳐 27마리가 들어온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또 이 풍산개들은 생후 2~3개월밖에 안된 어린 종자로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드나들며 곡물수입을 하던 애견가 김만수라는 분이 중국 천진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 '천인호'의 특등실에 태워 한국의 인천항으로 들여올 예정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특히 '동아일보'는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풍산군일대에서 널리 길러져 풍산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개들은 지금에 와서는 민간에서 사육이 금지될 정도로 북한당국의 특별대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구입경로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의 쌍마관광 김만수 대표의 부탁으로 1992년 10월 하순에 중국 조선족 이모 씨가 풍산개 종견장에 가서 당시 300여 마리밖에 없었던 풍산개 중에서 이 개들을 구입하여 중국에 들여왔다"고 구체적으로 실었습니다. 실제 풍산개 원종을 들여오기 위해 중국의 한 조선족 동포가 위험을 감수하고 김형권군 광덕풍산개종견장까지 직접 가서 종자용 새끼들을 빼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을 통해 들여 온 풍산개는 한국의 서울특별시 등촌동에서 검역을 받았습니다.

서울특별시 등촌동의 '동물검역소'에서 위생검역과 순혈종 판정을 받은 풍산개는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만만종견장'에서 합법적으로 사육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한국에 첫 풍산개종견장이 생겨났고 여기에서 마리수가 늘게 되었습니다. 이후 풍산개들은 경기도 용인시와 강원도 양양, 전라북도 익산시 등에 마련된 종견장들에서 더 크게 확산되어 한국의 천연기념물인 진돗개와 비슷하게 가격도 하락했습니다. 2000년 6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났습니다.

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풍산개 한 쌍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김정일로선 최선을 다한 선물일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처음 들여온 품종이 아니어서 상징적 의미가 컸을 뿐 실제로 대중적인 인기는 끌지 못했습니다. 김정일이 김대중 대통령에서 선물한 풍산개의 이름은 '자주'와 '단결'이었지만 남쪽에 와서 수컷은 '우리'로, 암컷은 '두리'로 이름이 바꾸었습니다. '우리'와 '두리'는 서울대공원에 있는 동물원에 보내졌고 그 다음해에 새끼를 낳았습니다.

북한의 호위사령부 아미산총국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우량종을 잃은 풍산개는 이렇게 많은 사연을 안고 대한민국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배가 불러야 짐승도 배부를 수 있다는 현실, 대한민국에서 잘 보존되고 있는 풍산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우리 탈북민들과 풍산개도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통일의 그날이 그래서 더욱 간절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