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와 39호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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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들을 통해 저는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위한 '만수무강연구소'와 북한의 특권층들을 위한 '아미산총국'에 대하여 이야기 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밀자금을 전문적으로 끌어들이고 관리해 오고 있는 노동당 재정경리부 산하 39호실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북한에서 잘 쓰지 않지만 비자금이라는 말은 불법적으로 몰래 감춰둔 돈, 비밀자금이라는 표현입니다.

북한에서 김씨 일가의 비자금은 이른바 '충성의 외화벌이'라는 미명하에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온갖 세외부담과 조직별로 거두어들이는 물질적 과제, 이름조차 다 헤아릴 수 없는 무역기관, 외화벌이 단위들을 통해 은밀히 노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북한의 무역기관, 외화벌이기관, 당 자금 확보를 위한 사업소들과 상업유통기관들에서 거두어들인 자금들은 모두 38호실과 39호실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38호실과 39호실은 외형상 노동당 재정경리부 산하이나 실제론 노동당 서기국 산하입니다.

노동당 서기국은 일명 김일성 서기실, 김정일 서기실로 불렸으며 지금은 노동당 정무국이라는 간판을 걸고 김정은 서기실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서기국이나 정무국은 노동당 내부 기관처럼 위장됐으나 실제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조직입니다. 서기국이나 정무국은 최고지도자의 역할을 뒷받침 하는 종합전략연구 및 통합지휘시설로 그 권한이 노동당을 뛰어 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를 해 드린 '만수무강연구소'나 '아미산총국'이 모두 노동당 서기국 직속단위들입니다.

이외 호위사령부와 만수대창작사, '4.15 문학창작단'과 '조선노동당역사연구소', 노동당 38호실, 39호실, 전략군사령부가 노동당 서기국 소속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 드리려는 노동당 39호실은 1970년대 중반 김일성이 조직한 외화벌이기관입니다. 노동당 39호실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김정일의 지위가 확고해진 1970년대 중반에 조직됐다고 하여 김정일이 직접 조직한 외화벌이 기관이라는 설이 많고 39호실의 관리도 군에서 실질적으로 관리했다고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합니다.

1960년대 김일성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계, 유일적 영도체제를 확립하는데 광분했습니다.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유일적 영도체제란 한마디로 조선노동당을 김일성의 사조직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김일성의 영구집권을 공식화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와 유일적 지도체계는 사실상 김일성의 영구집권뿐만 아니라 김일성을 우상화해 권력을 세습화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이런 시도는 해방 전 국내 공산주의 계열이었던 갑산파의 거센 도전을 받았습니다.

당시 갑산파의 우두머리였고 내각 부수상이었던 박금철과 이효순, 김도만과 허석선과 같은 인물들은 당 내부에서 개인숭배를 철저히 견제하면서 내각에 의한 권력의 분산을 꾀했습니다. 김일성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갑산파는 김일성과 무장투쟁을 해 온 빨치산 세력에 의해 1960년대 말 완전 숙청되었습니다. 갑산파는 김일성의 파쇼독재를 막기 위해 노동당의 외연확장을 철저기 경계해왔고 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당 자금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갑산파의 견제를 받아야 했던 1960년대 조선노동당은 개별적 당원들의 당비와 내각 국가계획위원회가 의결해준 예산을 가지고 운영돼 왔습니다. 노동당총비서였던 김일성은 당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서 심각한 자금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갑산파를 숙청한 김일성이 제일 먼저 손을 본 것이 내각이었습니다. 김일성은 1972년 12월 조선노동당이 모든 국가운영권을 가진다는 내용의 '사회주의헌법'을 내놓고 그동안 권력의 제동기 역할을 해 온 내각을 완전히 해산해 버렸습니다.

대신 김일성은 내각의 권한을 노동당에 전부 넘기고 노동당의 하부 조직이나 다름이 없는 정무원을 새로 조직했습니다. 정무원은 단순히 김일성의 의도나 노동당이 내놓은 정책들을 실무적인 차원에서 집행하는 형식적인 조직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 빨치산 출신들을 등에 업고 노동당에 발을 들이 민 김정일이 배후에서 큰 역할을 해 온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까지 김정일은 김일성을 뛰어 넘어 노동당 내부 조직들을 좌지우지할 만한 권한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부터 내각이 해체되기까지 김일성이 늘 품고 있던 야심은 국가의 재부를 독점하는 것이었습니다. 빨치산 투쟁을 할 때부터 김일성은 늘 돈에 메말라 있었고 해방 후 갑산파를 숙청하기 전까지 이러한 돈 가난은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내각을 해체한 후 김일성이 제일 먼저 손을 댄 부분이 국가자금을 손아귀에 걷어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의도에서 김일성은 내각 국가계획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권한을 노동당 재정경리부에 넘기고 그 산하에 39호실을 따로 내왔습니다.

재정경리부 산하에서 왜 하필 김일성이 조직한 외화벌이 기관이 39호실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많습니다. 그 중 가정 설득력이 있는 내용은 기존의 내각 국가계획위원회가 관리하던 주요 분과위원회의 순위와 연관이 있다는 설입니다. 내각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관리하던 분과위원회를 그대로 노동당 재정경리부로 옮겨 관리를 했는데 그중 외화벌이와 관련된 분실이 39호실었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 39호실은 내각 국가무역성을 관리하며 정상적인 외화벌이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내각 국가계획위원회의 권한이 모두 노동당 재정경리국으로 넘어간 이후 김일성은 자신의 비밀자금을 따로 관리할 목적으로 39호실을 외형상 노동당 재정경리국 산하로 유지하고 실제 권한은 노동당 서기국, 즉 자신의 서기실로 넘겼습니다. 또 노동당의 통치자금을 마련한다는 구실아래 북한의 외화벌이 기관들을 모두 39호실에 소속시켰습니다. 39호실을 노동당 서기국으로 옮기는 것과 함께 김일성은 김정일과 빨치산 출신들을 내세워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 지도체계를 완성했습니다.

당시까지 김일성은 김정일에 의해 완성된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 유일적 지도체계가 무서운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훗날 김정일은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는 노동당의 최종 목표인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라고 공식화했습니다. 그리고 당의 유일적 지도체계는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인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아래 실현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김일성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반드시 김정일을 거쳐 집행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김일성의 명령과 지시는 유일한 집행자인 김정일의 몫으로 일단 김정일이 무시해 버리면 김일성의 어떤 지시도 소용없게 된다는 것이 당의 유일적 영도체제와 유일적 지도체계의 본질이었고 김일성을 허수아비로 만든 김정일의 함정이었습니다. 여태껏 자금난에 시달려 온 김일성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39호실을 자신의 서기실에 끌어들였지만 39호실의 외화벌이 또한 당의 유일적 지도체계에 따라 김정일의 손을 반드시 거치게 되었습니다. 대를 이어 부와 권력을 누려보려던 김일성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 않음은 이때에 벌써 결론이 나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죽음과 관련해 아직도 석연치 않게 풀리지 않는 많은 수수께끼들, 어쩌면 이때에 김일성의 과욕이 만들어 낸 39호실 때문은 아닌지, 자금난에 시달리던 1990년대 북한의 실정을 놓고 앞으로 더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노동당 39호실의 역사는 다음시간에 계속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출연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