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한 해가 다 가고 새해가 멀지 않았군요. 해마다 연말이 되면 남한에서는 직장은 직장대로,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송년회를 가집니다.
북한도 역시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남한과 북한의 송년회는 형식부터가 완전히 다릅니다. 우선 식당에서 실컷 배를 채우고 미리 예약을 해놓은 노래방에서 한해 동안의 애환을 다 털어내며 즐겁게 놀아댑니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정해진 집에서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며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끼리 술판을 벌리고 오락회라는 것도 하죠? 그런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제가 만청산연구원에서 일하던 시절 송년회의 모습들이 자주 떠오릅니다.
서민들은 조촐했지만 북한 고위층들의 송년회는 정말 요란했습니다. 김씨 일가의 만수무강 연구를 전문으로 하던 저희도 송년회만큼은 큰 간부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근무하던 만청산연구원의 송년회에 대하여 이야기 해 드릴까 합니다.
남한에서도 예전엔 북한과 마찬가지로 송년회를 '망년회'라고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남한에서는 '망년회'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최근 저는 북한을 떠나 남한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탈북자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곳 사정이 몹시 궁금했는데 일반서민들은 생활이 어려워 직장동료들끼리 송년회를 하는 일은 드물어졌다고 하더군요. 다만 함께 장사를 하는 사람들끼리, 그리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술 한잔 기울이며 한 해를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의 금수산태양궁전은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금수산의사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일성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사업을 보았기에 민간에서는 '주석궁전' 혹은 '주석부'라고 많이 불렀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은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 연구소입니다.
금수산의사당 경리부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연구를 만청산연구원뿐 아니라 전국에 8호, 9호 제품들을 생산하는 특제품 생산기지들을 관리하면서 김씨 일가의 먹을 거리를 전문적으로 보장하는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송년회 역시 전국에서 끌어들인 특제품들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연구원의 각 실장들은 기술연구를 위해 해외에 출장도 자주 다녀왔습니다. 김씨 일가의 건강을 위한 것이라면 지구상 어디든 가서 구입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연말이면 항상 다른 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는 연구원들이 많았는데 조두형 식품보약화실장, 장경룡 식료공학실장, 김경배 응용공학실장, 배명성 자동화공학실장, 오명석 통보자료실장은 한 해에도 여러 차례 해외에 나갔습니다.
해외에서 각 나라들에서 건강식품 연구동향과 재료들을 파악하고 분석용 샘플들을 가져왔습니다. 송년회를 하는 12월이면 모두 평양으로 돌아왔는데 다른 나라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품들을 가져와 송년회 식탁을 더 풍성하게 했습니다.
외국에 나갔던 사람들이 송년회에 참가하면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해당 나라들의 대표적인 술 들이었습니다. 중국의 모태주(茅台酒), 러시아의 보드카(vodka), 인도의 올드몽크(old monk)와 같은 이름난 술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됩니다.
조두형 실장은 애주가인 김일성과 김정일이 마시는 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는데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모태주 한 병이 중국 돈으로 1천 위안이라는 말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시가로 계산해도 술 한 병이 155달러가 됐습니다.
안주로 가공된 건식들도 외국에서 가져왔는데 송년회 자리에서 안주거리를 놓고 건강식품 연구사의 입장 에서 토론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절인 오리알인 '송화란'이나 사무용 간식들에 대해서도 늘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그때 '휴대용 계란'이라고 불리던 제품이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운곡목장에서 생산하는 계란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식탁에 오르는 건강기능성 계란을 특별히 개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셀렌달걀, 중국에서는 요드달걀, 윙그리아 즉, 항가리에서는 고추달걀 등 세계적으로 다양한 건강기능성 계란들이 개발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송년회 자리에서 저의 실장이 '휴대용 계란'을 권하며 저에게 연구해보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휴대용 계란'은 일본의 기술을 모방해 중국에서 많이 생산했는데 사무실이나 출장 길에 가지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한 것이었습니다. '휴대용 계란'은 약초 양념 액에 수개월간 침적시킨 후 삶아서 얇게 썰어 건조시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계란은 보관과 휴대가 쉽고 영양가가 높아 성인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송년회 자리는 이처럼 새로운 연구 과제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로도 유명했습니다. 송년회가 좋은 것은 가족들도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송년회 날짜는 연구원 당위원회에서 각 연구실 별로 날짜와 시간을 똑같이 정해주었습니다. 대내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연구실과 합쳐서 송년회를 치르는 것은 절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송년회 물자는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있는 금수산의사당경리부 공급소에서 직접 제공했습니다. 각 연구실 마다 송년회 물자를 운반할 차량도 배정이 되었는데 음식재료는 모두 저희들이 연구해 북한의 고위층들에게 공급되던 특제품들이었습니다.
송년회 술 종류로는 특제품으로 생산된 태평술과 삼백술, 룡성맥주와 같은 것들이 보장됐습니다. 딸기사이다, 배단물 등의 음료들과 소고기, 돼지고기를 비롯한 육류, 참가자미, 대합조개처럼 귀한 수산물들을 이날에는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마른 명태, 말린 조개 살과 바나나와 같은 열대과일들도 있었습니다. 과실 류와 육류 등 송년회에 제공되는 모든 식 자재는 김씨 일가와 중앙의 고위 간부들을 위한 특제품들로 북한의 시장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식 자재들 중에는 제가 맡은 운곡목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많았습니다. 인민들은 절대로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연구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 동료들 속에서 높이 평가를 받을 때면 자랑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송년회 물자는 평양시민들도 보면 안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함(박스)에 포장해 이동됐습니다. 음식 재료는 송년회에 참가하는 연구원 가족이 아니면 누구도 볼 수 없었고 어떤 음식이 올랐는지도 대외에 발설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송년회에 참석하는 연구원 가족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음식재료와 물자에 대해 절대로 발설하지 말도록 미리 주의사항을 강조했습니다. 1992년은 김일성의 출생 80돌과 김정일의 출생 50돌을 한꺼번에 맞던 해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벌써 북한은 식량난으로 하여 평양시를 제외한 지방에는 배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을 나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되던 1990년대 초부터 북한은 인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지 못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소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두부나 술을 만들고 남은 비지로 연명했습니다. '망년회' 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인민들은 굶주렸지만 사회와 격리된 만청산연구원들은 외부의 상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고통 받는 인민들을 기만하기 위해 김정일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라는 구호를 내놓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척 흉내를 냈습니다. 그러면서 뒤로는 국내 특제품들과 외국에서 비행기로 날라 온 진수성찬들로 기름진 배를 채웠습니다.
김정일에게 기생충처럼 붙어사는 하수인들도 가난의 그 세월 온갖 특제품들로 송년회를 즐겼습니다. 수백만 인민이 굶어 죽던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일은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서관희 농업비서에게 간첩 혐의를 들씌워 처형했습니다.
해마다 송년회를 맞을 때면 북한에서 겪던 '고난의 행군'이 떠오릅니다. 올해는 북한의 인민들도 송년회를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새해입니다. 내년 송년회는 통일된 조국에서 북한의 인민들과 함께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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