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17년 정월 초하루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음력설도 지났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분단된 조국에 평화가 깃들고 통일의 그날이 어서 오기를 우리 민족 모두가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해 첫 아침부터 김정은은 신년사를 통해 “대륙간탄도로케트 시험발사 준비가 마감단계에 이르렀다”며 또다시 이 땅의 평화를 위협할 무모한 불장난을 암시했습니다. 핵개발도 절대로 멈추지 않겠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인민을 핵무기의 인질로 삼아 세습노예 정권을 영구화하려는 것이 김정은의 어리석은 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북한의 핵개발은 2014년 7월 9일 88살의 나이에 죽은 노동당 전 군수담당 비서 전병호가 깊숙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의 핵개발에 일생을 바쳐 온 노동당 전 군수담당 비서 전병호에 대하여 밝히려고 합니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2017년 1월 25일 ‘빛나는 유산을 마련해주신 불멸의 업적’이라는 제목으로, 사망한 전병호가 쓴 수기를 공개했습니다. 이 기사는 전병호가 죽기 3년 전인 2011년 10월에 김정은의 우상화를 위해 쓴 수기였는데 이미 ‘인민들속에서’라는 북한의 도서에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전병호는 항일빨치산 출신 유자녀로 1926년 3월 20일에 자강도 전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병호는 1970년대부터 당중앙위원회 부부장, 부장, 비서로 빠르게 승진하며 북한의 국방공업에 관여해 왔습니다. 1982년에는 북한의 군수산업을 담당한 제2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1998년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습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한 2010년 6월부터 2012년 3월까지 노동당 군수담당 비서의 직책을 맡았으며 86살이던 2012년 5월에 권력계에서 무난히 은퇴했고 88살이 되던 2014년 7월 9일에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북한에서 백두산 줄기, 일명 ‘백두혈통’에 속하는 전병호는 노동당 중공업부장, 군수담당 비서였던 한성룡과 인민군 총참모장, 중앙당 후보위원인 오극렬과 함께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으로 김일성의 총애를 누구보다 많이 받아 온 인물입니다. 만경대혁명학원이 개교하기 전까지는 당시 김일성의 저택으로 사용되던 ‘당창건 기념관’에서 김일성의 아내인 김정숙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김일성의 저택에서 살던 1946년 20살이 되던 해에 전병호는 김정숙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북한이 인재양성을 위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유학생들을 대량으로 파견하던 시절이었는데 농촌에서 자랐던 전병호는 “무슨 공부를 하고 싶냐”고 묻는 김정숙에게 “농사를 짓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대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김정숙은 나라의 산업발전을 위해 쇳물을 녹이고 기계를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말해주었고, 결국 전병호는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금속기계공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전병호는 이런 내용을 자신의 수기에서 자세히 밝혔습니다.
지난해 2016년 5월, 김정은은 7차당대회 보고에서 북한체제 수호에 앞장섰던 빨치산 출신들과 하수인 48명의 이름을 열거했는데 그 속에는 전병호의 이름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만큼 전병호는 북한의 핵무기개발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북한은 2014년 7월 전병호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자 당중앙위원회와 국방위원회의 공동명의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군수산업 중책을 맡아 북한을 인공위성 발사국, 핵보유국으로 만드는 데 특출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병호는 6.25전쟁이 한창일 때 모스크바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53년 2월 27일, 자강도의 한 군수공장에서 포탄을 만드는 기술자로 일했습니다. 그가 일하던 공장을 찾아 온 김일성은 포탄생산량을 기존의 2배로 늘릴 것을 지시했습니다. 전병호는 김일성의 지시대로 포탄생산량을 늘렸고 전후에는 북한에서 생산된 강재를 가지고 처음으로 포탄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전병호는 1966년 북한의 국방공업인 제2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했습니다. 1990년대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북한은 심각한 체제위기에 몰렸습니다. 체제유지를 위해 후계자였던 김정일은 핵을 개발해야 한다고 떠들었는데 여기에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전병호를 끌어들였습니다.
2011년 7월 미국의 유명한 신문 ‘워싱턴포스트’는 김정일의 지시로 핵기술을 빼내기 위해 노동당 군수동원부 부장이었던 전병호가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던 강태윤을 통해 뇌물공세를 벌렸던 사실을 폭로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강태윤은 당시 파키스탄 군 참모총장 카라마트에게 3백만 달러의 현금을, 줄피카르 칸 당시 중장에게 50만 달러짜리 금강석을 선물했고 전병호가 보낸 서한을 파키스탄의 핵 물리학자 압둘 카디르 칸 박사에게 전달했습니다.
전병호는 서한에서 “항공기 편으로 미사일을 보낼 테니 그 비행기 편으로 핵 기술 자료와 부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004년에 파키스탄의 핵물리학자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자신의 진술서와 함께 전병호가 보낸 서한을 공개했습니다. 또 평양을 10여 차례나 드나들면서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와 설계도를 북한에 넘긴 사실도 폭로하였습니다. 1997년에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도 전병호가 파키스탄에서 핵기술을 입수한 사실을 밝혔습니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전병호는 1996년에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파키스탄에 노동미사일 개발기술과 장비를 제공하고 대신 파키스탄으로부터 고농축우라늄 기술과 장비를 제공받는다는 “핵과 미사일 기술교류협정”을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병호는 1990년대 핵무기를 더 빨리 완성하고 생산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플루토늄을 수입하자고 김정일에게 거듭 제안했으나 파키스탄을 다녀온 후로는 플루토늄보다 우라늄에 더 집착하면서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병호의 사위 윤호진 역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깊숙이 관여했고 지금도 북한에서 핵무기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전병호를 북한의 핵개발 총 책임자로 내세우고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에도 전병호의 가족들을 특별히 돌봤습니다. 기계공업부분을 전공하고 군사과학으로 일생을 보낸 전병호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북한은 15년이라는 간고한 노력 끝에 2006년 10월 9일 마침내 첫 핵실험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은 핵을 ‘만능의 보검’이라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핵을 만든 김정일과 ‘핵, 경제 병진노선’을 내놓은 김정은이 방관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핵 강국이라고 자랑하던 소련이 왜 해체되었고 핵보유국인 중국은 왜 사회주의 원칙을 버린 채 개혁개방을 택했는지 입니다. 핵은 군사적 목적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 될지 모르지만 체제를 수호하는 수단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핵을 보유한 파키스탄은 지금도 아시아에서 가난한 국가일 따름입니다. 북한과 같은 노예왕국에서 핵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북한은 벌써 10여 년 전에 첫 핵실험을 했고 핵을 체제유지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신 핵을 만든 대가로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핵이 북한경제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북한의 인민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전병호는 자기의 수기에서 김일성이 한평생 품을 들여 자주적 국방공업을 창설했고 김정일이 핵을 만들어 민족의 존엄을 만방에 떨치었기에 북한의 인민들이 온갖 복락을 다 누리며 살 수 있었다고 서술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북한에서 인민들이 온갖 복락을 누렸다는 거짓은 핵을 만드는데 제일 큰 기여를 한 전병호와 그의 가족들에게 영원한 치욕으로 될 것입니다. 핵은 재앙의 도구이지 인민들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주는 ‘만능의 보검’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