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자재 건강식품 포장에도 외화 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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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북한에서 근무를 하던 만청산연구원에는 도안과 사진만을 전문으로 부서가 따로 있었습니다. 도안 및 사진실이라고 불렀는데 그곳 직원들은 생활총화나 강연회가 있는 날에만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안과에는 평양미술대학 출신 8명의 미술가들이 있었습니다. 도안과에 속한 사진제작실은 사진사 1명과 보조원이 1명이 전부였습니다. 사진사는 평양영화연극대학 영화학부 촬영학과를 졸업한 김종영이었습니다.

김종영은 도안 및 사진실의 당 세포비서를 겸하였는데 서로 다른 업무를 맡고 있는 도안 과와 사진 실이 같은 당 세포인 것으로 하여 하나의 행정체계로 구분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올리는 특제품의 포장은 모두 도안 과에서 담당했습니다.

주요 명절 때면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으로 된 식료품 선물이 고위간부들에게 전달됐는데 그 속에는 룡성특수식료공장(428공장)에서 생산한 '딸기사탕', '살구씨향 과자', '말기전병', '생과자'를 비롯한 특제품들도 들어 있었습니다.

룡성특수식료공장에서 생산한 특제품들은 다른 공장들에서 생산된 제품들과는 속은 물론 겉포장부터 달랐습니다.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인 룡성특수식료품공장, 태평술공장, 대성담배공장의 포장은 모두 도안 과에서 제작했습니다.

사실 19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 일가에 보장되는 먹을거리는 포장의 질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 역시 건강장수 식품에 대한 관심은 높았지만 그러한 식품의 포장까지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체제는 어느 나라나 다 그러했는데 북한 역시 인민들의 먹을거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만 몰두하면서 내용물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고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더욱이 포장은 아예 무시한 상품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어쩌다 평양시의 상점들에 나온 당과류를 비롯한 먹을거리들도 포장지에 공장명칭과 용량만 간단히 밝히는 게 전부였습니다. 때문에 인민들은 먹을거리의 조합이나 영양성분에 대해 파악할 수 없었고 다른 나라상품들도 다 그러려니 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몰락을 앞둔 소련이나 다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인민들에게 공급할 먹을거리도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나라들의 식료품 수출이 멈추면서 급해난 건 북한의 외화상점들이었습니다.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로부터 먹을거리와 상품들을 수입해 달러를 받고 팔아 온 외화상점들은 당장 판매할 물품이 없었습니다. 급해 맞은 북한은 하는 수 없이 자본주의 나라들의 먹을거리와 상품들을 들여다 외화상점들에게 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평양에 있는 외화상점들을 돌아보면서 김정일은 자본주의 상품의 화려한 포장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김정일의 요구수준은 높아졌습니다. 룡성특수식료공장과 8, 9호 농장들에서 생산된 제품의 포장에 각별한 신경을 썼습니다.

특제품 도안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으로 만청산연구소에 도안 및 사진실을 내오고 각국에 파견된 대사관을 통해 자본주의 나라들의 산업미술 도안자료 집과 다양한 분야의 카탈로그들을 구입해 들이도록 했습니다.

김정일은 외국에 파견된 대사관들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만청산연구소 도안 및 사진 실에 보내 산업디자인을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또 제품의 특성과 맛을 살리는 방향에서 포장도안을 그리도록 내부적인 지시도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만청산연구원 간부들은 갑작스럽게 특제품 포장을 놓고 투정질을 부리는 김정일의 성화에 거듭되는 홍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초기 도안 및 사진 실 미술가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좋아하는 색깔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늘 떠드는 붉은 기, 붉은색이라는 개념밖에 없어 화려한 붉은 색으로 도안을 장식했다가 날벼락을 맞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거듭되는 비판을 받아가면서 깨달은 것이 김일성은 람색을, 김정일은 학의 머리에 있는 연푸른색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92년 김일성의 생일 80돌을 맞으며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의 특제품공장들에서 생산된 수백여 종의 식품견본들을 돌아 본 김정일은 자기가 좋아하는 색상으로 화려하게 달라진 제품의 포장을 높게 평가하며 치하의 감사장도 하달했습니다.

도안 및 사진 실에서는 한 가지 특제품이 개발될 때마다 그에 해당한 도안을 보통 5장씩 그렸습니다. 이 도안들을 내부 미술가들이 자체로 평가하는 회의는 거의 매일 열렸습니다. 그 중 3장을 행정 실 종합지도원에게 제출했습니다.

실장이 제출한 도안은 종합지도원이 연구원 부원장 겸 초급당 비서인 신영민에게 올렸습니다. 여기에서 실장들과 여러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선택된 1장의 도안이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의 상표공장으로 넘겨졌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계획 과에서 특제품의 수량을 확정하면 도안은 포장에 사용됐습니다. 김정일은 늘 "우선 포장 도안은 보는 순간 먹음직스럽게 그려야 하며 그러자면 내용물의 색상이 진품 그대로 표현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에서 비싼 돈을 들여 미술도구들을 사들였습니다. 수채화구와 아크릴물감, 포스터물감 등 해외의 유명한 상표의 고급 색감들을 구입하는데도 상당한 외화가 탕진됐습니다.

물감 외에도 화판받침대(이젤), 붓, 화지(畵紙), 심지어 일본에서 생산하는 톰보(TOMBOW)연필까지 수입하여 공급했습니다. 한국에서 디자인이라 부르는 설계를 북한에서는 도안라고 불렀습니다. 도안 못지않게 사진제작도 중요했습니다.

새로운 특제품이 개발되면 우선 현실감을 잘 살린 사진을 김정일에게 올려 보내는 설명서에 부착했습니다. 특제품들이 완성되면 매 건당 생산공정과 제품원료, 공정별 생산현장사진, 완성품 등을 찍어서 수십여 년 후에도 볼 수 있는 장기보관용 자료를 만드는데 이때 내용과 함께 시각적인 이해를 돕는 사진도 남기게 됩니다.

제가 연구한 해조계란을 사진 찍을 때 김종영 사진사는 사진촬영 도구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카메라가 '올림푸스'였는데 당시 가격으로 4천 달러짜리라고 자랑하던 생각이 납니다. 카메라보다 렌즈의 가격이 더 비싸다는 사실도 그때 김종영 사진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저의 큰아들 첫돌 사진도 김종영 사진사가 몰래 찍어주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초급당 위원회에서 즉시 불렀습니다. 저와 함께 당위원회에 불려가 비판서를 쓰던 김영종 사진사에게 미안해하던 마음을 지금도 감출 수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을 위한 식자재와 건강식품들은 포장까지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인민들을 위한 상품은 정말 볼품이 없었습니다. 해마다 김일성, 김정일의 생일에 어린이들에게 주는 선물포장은 한국의 인터넷에도 많이 떠돌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어린이들에게 어쩌다 주는 소위 '선물'이라는 당과류의 포장과 그 속에 든 허술한 내용물들에 기가 막혀 할뿐입니다. 그 어린이 '선물'의 포장과 내용물이 오늘날 김정은이 통치한다는 북한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