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만청산연구원에는 김부자의 건강장수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사들과 그들의 업무를 보장하는 후방부서인 운수과와 자재과가 따로 있습니다. 오늘은 이 부서들 중에서 운수과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윤전기재(차량)라고 불리는 승용차나 버스는 현대인들의 필수적인 이동수단입니다. 2015년 9월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2천 76만대입니다. 현재 남한의 매 가정 당 자동차가 2대 정도는 된다는 얘기입니다.
오늘날 자동차 산업은 부유한 한국을 떠받치는 중요한 수출품목이지만 북한은 아직도 자동차 한 대 변변히 생산을 못하고 있습니다. 중앙이나 지방의 간부들도 외국에서 수입한 승용차를 탈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북한의 현실입니다.
자동차공업도 변변치 못한 북한이지만 김일성 일가의 편의를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 벤츠 방탄승용차부터 이탈리아에서 만든 초호화 유람선, 우크라이나에서 생산한 전용비행기까지 그 값은 계산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직접 사용하는 이동수단들 말고도 이들의 호의호식을 위한 소비품들, 호위총국의 경호수단과 만수무강 연구에 드는 비용까지 대충 짐작을 하면 북한의 인민들이 한해 편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되지 않을까 하고 늘 생각했습니다.
만청산연구원 운수과만 해도 신영민 부원장이 타는 승용차는 독일산 비엠더블유(BMW)였습니다. 연구원의 매 실들에 배정된 일본산 닛산 차량들도 9대가 있었습니다. 자재과에는 일본산 1톤 트럭과 행사보장을 위한 소형버스가 있었습니다.
실험자재와 생산된 특제품을 운반하기 위하여 2실과 3실, 4실, 5실에 배정된 전용차들은 화물겸용 승용차인 일본제 라이또방(light van)이었습니다. 연구원들이 시험재료들과 자재들을 실을 수 있도록 특별히 개조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소속된 2실 식품보약화연구실 연구사들은 운곡목장이나 태평술공장, 금수산연구소, 림상검토과 등 현지연구를 자주 나갔는데 실험결과나 생산된 특제품들을 이 차에 실어 연구원으로 운반해 분석했습니다.
한국 같으면 개인들이 다 차를 가지고 있으니 필요할 때면 마음대로 어디든 오갈 수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다른 기관들에 비해 고급한 차량들이 많이 보장된 만청산연구원도 자기 실에 있는 차조차 마음대로 못 다루었습니다.
연구과제와 보고서는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현장에 나가야 할 연구원들이 많아 차량을 이용하려면 한 주일 전에 미리 신청을 해 두어야 했습니다.
개인의 사적인 이용이나 내부적인 비밀누출을 우려해 차량을 신청하려면 먼저 사용처를 밝힌 신청대장을 작성해야 했습니다. 신청대장은 연구실 실장의 비준을 받은 후 행정실을 거쳐 당위원회의 심사까지 거쳐야만 사용허가가 내려왔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자신들의 건강장수를 위한 연구에는 돈을 펑펑 쓰면서도 연구원들의 편의는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동차를 비롯해 연구원들의 후방비용은 항상 빠듯해서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했습니다.
차량 이용에서 제일 걸리는 문제는 휘발유나 디젤유와 같은 연료공급이었습니다. 평양에서 출발해 제가 담당했던 운곡목장까지 거리는 60km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도로들이 좋지 않아 운행시간은 보통 1시간 20분에서 1시간 40분 정도였습니다.
평양에서 안주시 운곡목장까지 출장을 떠나려면 먼저 그곳까지 거리에 해당되는 기름전표를 받았습니다. 기름전표는 휘발유로 kg당 15km로 환산해 주었습니다. 운곡목장 가금직장까지 왕복으로 150km여서 휘발유는 10kg밖에 차례지지 않았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연유공급소는 평양시 형제산 구역 서포동에 있었습니다. 출장을 떠나려 서포동 연유공급소에 들리면 기름을 받으러 온 차량들이 너무 많아 한나절 다 가도록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많은 차량들을 보면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북한에서 만든다는 '승리' 자동차는 그 속에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일본 미쯔비시나 독일의 벤츠와 같은 대형 차량들과 승용차들이었는데 그 차량들이 단순히 김일성, 김정일만을 위해 뛴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습니다.
여름철에 연유공급소에서 기다릴 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냉풍기를 켜지 못하던 운전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저의 연구실 담당 운전수의 이름이 강용섭이었는데 정말이지 좁쌀도 쪼개먹을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름 조절을 잘했는지 연구원들의 출장과정에서 조금씩 절약한 휘발유를 모아두었다가 몰래 팔기도 하였고 출장을 나온 연구원들이 일을 보는 시간이면 몰래 다른 사람들의 심부름도 해주고 뇌물을 챙기곤 하였습니다.
1990년대 초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북한은 심각한 연료위기를 맞았습니다. 연구원들의 출장도 휘발유가 없어 될수록이면 한꺼번에 몰아서 보냈습니다. 그나마 운전수들에게 휘발유 절약을 지나치게 강요했습니다. 워낙 휘발유 공급에 불만이 많던 강용섭 운전수가 출장이 있을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북한에서 누가 결혼식을 한다고 하면 동네 주민들은 신혼부부가 타는 차부터 관심을 가집니다. 신혼부부가 탄 승용차가 어떤 것이고 승용차를 타는 고위 간부들이 몇 명이나 손님으로 왔는가에 따라 가정의 재력과 권세가 평가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만청산연구원 운수과에서 관리하는 승용차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었습니다. 신형인데다 관리가 잘 돼있어 한다하는 간부들의 결혼식에 자주 동원되었습니다. 연구사들도 본인과 직계 가족까지는 당위원회가 결정해 승용차를 허가해 주었습니다. 사실 그 쯤만 돼도 북한에서는 대단한 인물임을 당당히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에 등록된 차는 원장이나 부원장이 타는 차까지 모두 운수과에서 관리했습니다. 한번은 강용섭 운전수에게 우리 실에서 쓰는 라이또반의 값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는데 "그런 건 운수과장도 모를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운수과에는 차량관리와 운행일지를 작성하는 과장과 차량수리와 부속품관리를 맡은 정비원들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운전수들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부속품에서 수리에 이르기까지 일체 제힘으로 해결해야 하나 만청산연구원 같은 기관은 달랐습니다.
운전수들은 외부와 내부의 먼지나 닦는 정도였지 수리는 따로 정비원들이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운전수들의 기술실력은 대단히 뛰어났습니다. 출장도중에 차가 고장나면 운전수 자체로 차를 수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인지 만청산연구원의 승용차나 화물차 운전수들도 하나 같이 공기펌프나 쥬브(튜브)를 땜질할 수 있는 간단한 수리 공구는 늘 가지고 다녔습니다. 만청산연구원 연구사들은 다른 실에서 진행되는 연구에 대해 절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실이 어떤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는 우리 연구사들보다 급수가 훨씬 낮은 운수과 운전수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부 비밀을 아무리 철저히 지킨다는 만청산연구원도 운전수들의 눈까지 가릴 수는 없었나 봅니다.
가끔씩 혼자 출장을 떠날 때면 강용섭 운전수가 다른 실에서 진행되는 연구며 연구원 내부에서 있은 재미있는 일화들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우리 실을 맡았지만 운수과 소속이었던 강용섭 운전수를 잘 따르고 좋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인간도 있었고 지금은 볼 수 없어도 항상 그리움이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어서 그 무슨 '궁전'에 누워있다 해도 인민의 가슴에 증오만 남긴 자들보다 텁텁한 손을 비비며 담배 한 대를 빌던 보고 싶은 그 사람이 진정 '심장에 남는 사람'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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