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해 벽두부터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김정은 정권에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의 위험한 불장난에 한반도의 긴장수위도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세가 긴장될 때면 해마다 북한에서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던 적위대 훈련이 생각납니다. 만수무강연구소도 각종 민방위 훈련과 적위대 훈련에서 빠질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만청산연구원은 상급 기관인 금수산의사당경리부에 소속돼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호위총국이 개미 한 마리 얼씬 못하게 지키고 있는 금수산의사당 시설 내에도 북한의 어느 기관이나 마찬가지로 직원들을 위한 적위군훈련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 적위군 훈련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노농적위군 훈련소는 평양 시 룡성구역 어은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할 당시까지 북한에서 노농적위군 훈련소는 적위대훈련소로 불렸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적위대훈련소는 외부인원들의 출입을 철저히 단속했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가 북한의 다른 기관, 기업소들과는 달리 김일성 일가의 비밀스러운 사치생활을 보장하는 특수기관이어서 훈련소에 외부인들이 들어오면 내부 비밀이 새어 나갈 수 있다는 구실이었습니다. 적위대훈련소 보안은 8호안전부가 맡았는데 경비가 삼엄했습니다.
다른 공장, 기업소들에 비해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소속 적위대의 훈련 체계와 내용이 달랐던 점도 외부인원의 출입을 철저히 금지한 원인이 아니었겠나 추정이 됩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가 김일성 일가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관이었던 탓에 적위대의 규모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근무하던 만청산연구원은 북한의 다른 공장, 기업소들과는 달리 교도대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적위대는 군사복무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로 유사시 자신이 속한 공장기업소의 방위와 생산을 전문적으로 담당해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장, 기업소에 속했다 하더라도 군사복무를 마친 제대군인들은 지역방위를 맡은 준군사조직 교도대에 망라돼 적위대와는 따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였던 만청산연구소는 제대군인 출신이라 해도 교도대에 소속되지 않고 적위대에 소속됐습니다.
일반 공장기업소 적위대원들은 매해 보름동안의 훈련을 받았는데 만청산연구원의 훈련기간은 한주일로 짧았습니다. 이런 제도가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 모든 공장, 기업소들에 적용된 것인지 아니면 만청산연구소에만 특별히 적용됐는지는 저로서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당위원회에서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의 노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그래서 훈련기간이 일주일로 단축되었으니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 적위대에서 만청산연구원만 특별히 배려했을 것이라고 저는 짐작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의 적위대는 일반적인 적위대와는 훈련도 상당히 달랐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한 후 '3대혁명소조'를 마치고 1990년 10월에 금수산의사당경리부 만청산연구원에 배치 받아 다음해인 1991년 1월 세 번째 주에 일주일동안 적위대훈련을 받았습니다.
월요일에 입소해 토요일에 퇴소를 하였는데 훈련기간이 짧아도 훈련과정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훈련이 시작되는 아침이면 너무도 피곤해서 인원점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처벌로 몇 번씩이나 동작을 반복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훈련과정은 일반 적위대원들처럼 오전이면 정치교육이나 군사이론을 교육받는 상학시간이고 오후가 되면 실전동작을 배우는 훈련시간이었습니다. 이론교육 과정이 일반 적위대원들과 달랐는데 유사시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 다른 기관들과의 협동과정을 교육받았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김일성 일가에 가장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후방물자를 공급해야 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은 유사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먹을거리들을 과학적으로 보관관리를 하는 방법과 원칙적 문제들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실전훈련 시간은 제식훈련과 무기분해 및 결합, 조준사격연습, 수류탄 던지기와 집단강행군, 반항공대피요령과 핵대피동작훈련, 전호부설과 화학생물무기 대응훈련, 장애물 극복훈련 등 일반 적위대원들이 받는 훈련과 모든 과정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적위대훈련은 매우 고된 과정이었지만 실전훈련에 참가하는 적위대원들의 책임감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면 만청산연구원은 호위사령부의 엄격한 경호를 받는 기관으로 직접 총을 잡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적위대훈련소에서 제일 인상에 남았던 것은 평소보다 높은 식생활 수준이었습니다. 적위대훈련소 식생활은 중앙당 지도원들을 위한 내부 식당보다 훨씬 고급했습니다. 당시 평양과 지방의 적위대원들은 식생활 보장이 어려워 집에서 출퇴근을 하며 훈련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적위대훈련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후방공급이 잘 되었습니다. 훈련기간에 끼마다 육류는 과도하게 식탁에 올랐고 겨울철인데도 야채는 근처의 특제품 목장인 중이목장 남새(채소)작업반에서 심은 것들로 갖가지 종류가 싱싱하게 공급됐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먹을거리를 다루는 금수사의사당경리부의 특세가 적위대훈련장에서도 이색적으로 풍겨졌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먹을 과일류는 금수산의사당경리부 9호제품 관리소에서 보장을 했는데 그중에 옥에 티만큼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불합격품으로 취급됐습니다.
그 중의 일부가 적위대훈련소에 공급됐는데 우리 연구사들도 겉으로 살피면 무엇이 잘못돼 불합격품이 됐을지 분간이 어려웠습니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적위대훈련소는 사계절 신선한 사과와 배, 토마토 등의 과일들은 물론 육류와 남새, 우유도 정상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적위대훈련소에는 고정된 요리사 3명이 있었는데 훈련생들로 한번에 5명씩 교대로 식사당번을 나가야 했습니다. 한번은 요리사들이 없어 제가 직접 후방부 지도원을 따라 식자재를 받으러 식당 뒤쪽에 있는 후방창고건물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금수산의사당규모를 대충 짐작하고 있는 저로서도 거기에 있는 냉동창고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컨테이너 4개 규모의 냉동창고속에는 소고기며 돼지다리와 같은 육류는 물론 동태, 가재미를 비롯한 수산물들이 지함(박스)과 피피(pp)마대에 질서 있게 쌓여져 있었습니다.
냉동창고 외에도 당과류와 음료들을 보관하는 창고는 따로 있었는데 룡성생과자와 딸기사탕, 살구씨향과자가 빼곡이 쌓여있었습니다. 적위대훈련도 그런 특혜를 받는 만청산연구소에서 생활하다 보니 지방의 인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한지 8년 만에 휴가차 고향에 내려갔는데 그때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돼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시각도 적위대훈련소 식당 퇴식구의 쓰레기통에서 먹다 버린 고기점들이 둥둥 떠다닐 것을 상상해봤습니다.
적위대훈련을 생각할 때마다 훈련기간에 있었던 '만전쟁'을 떠올립니다. 북한에서는 페르샤만에서 있은 전쟁이라는 의미로 걸프전을 '만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이라크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과도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독재자였습니다.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미교육만 받아온 우리는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민들에게 배급도 못주는 북한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로 온 몸이 전율했습니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는 만약 김정일이 없다면 미국이 벌써 북한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남았을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을 점령하면 조선노동당원이고 김일성 일가를 위해 만수무강연구를 하던 우리 연구사들은 첫 번째 처형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은근히 두렵습니다. 수많은 고위간부들을 마구 처형하고 있는 김정은의 공포정치를 체험하면서 이제는 만청산연구원이나 만수무강연구소의 연구사들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민주주의가 실현된 북한에서 인민을 위한 만수무강연구를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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