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스승, 박동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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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그토록 웃음거리가 됐던 '김정은 원수님 혁명 활동' 교수참고서를 얼마 전 저도 우연히 접하게 됐습니다. 2014년부터 북한의 교육 기관은 '김정은 혁명활동' 과목을 신설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재의 내용이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3살 때부터 사격을 했고 3초 동안에 10발을 쐈는데 모두 명중했다거나 6살 때부터 야생말을 탔는데 기마수보다 더 잘 탔다는 등 너무도 허황한 얘기들이어서 기가 막힐 뿐이었습니다.

김정은의 혁명역사 교재엔 고향이나 출생연도, 가정환경, 교육과정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그런 교재를 보며 '김정은 혁명활동' 수업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최고 존엄'에 대한 의혹만 잔뜩 키워놓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교수참고서에는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외국에 유학을 가면 어떠냐고 묻는 질문에 김정은이 "만경대 가문은 사대를 모른다"는 대답을 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김정은이 6년간이나 스위스에서 유학했던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나이로나 경력을 따지면 '김일성 정치군사대학'을 졸업했다는 김정은의 학력도 모두 거짓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과거를 숨기고 미화하는 건 만경대 가문, 백두혈통의 타고난 기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정일의 과거 역시 엄청나게 부풀려졌습니다.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과정도 과도하게 미화돼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저도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기에 오늘은 김정일의 스승 이었던 박동근 교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1960년 9월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습니다. 현재 김일성종합대학 본관 2층에는 '김정일 동지 혁명사적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시절 김정일의 사진과 유물이 5개의 방에 꽉 차게 전시돼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이 사적관을 정기적으로 관람하고 그곳에 전시된 내용을 중심으로 학습 토론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화려한 가정배경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대학시절 동창생들 속에서 그닥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은연중 김정일의 과거사를 많이 접하게 되는데 대학기간 출석률이 제일 낮았고 성적도 매우 나빴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오늘날까지 대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창생들속에서 김정일은 소련제 오토바이를 즐겨 탔다는 정도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대신 김정일은 서정적인 음악을 즐겼고 만화그림을 뛰어나게 잘 그리는 재간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도 대학생활 기간에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김정일의 과거를 논한다는 건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종합대학' 혁명사적관에 전시된 내용과 전혀 다른 김정일의 과거가 암묵적으로 후배 대학생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일부러 헐뜯자는 것은 아닌데 어쨌든 김정일은 대학기간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김정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접하게 된 건 제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 소조원' 생활을 마치던 시기였습니다.

제 전공이 생물학 부였기에 저의 '3대혁명소조' 생활도 강원도에 있는 한 축산농장에서 했습니다. 당시 저와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이던 박동근 교수의 딸도 강원도 원산 시에 '3대혁명소조원'으로 배치됐습니다.

소조원 생활이 끝날 무렵 우리는 평양에서 열리는 한 '기술전시회장'에서 만났고 그녀의 초청으로 대학 동창 두 명과 함께 나는 박동근 교수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은 생전에 대학시절 자신을 배워주던 스승들에 대해 밝힌바 있습니다.

특히 박동근 교수님에 대해서는 "조리 있게 차근차근 설명을 잘한다"고 평가했습니다. 박동근 교수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 교수로 김정일의 논문을 담당한 교수였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동서양 철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김정일이 박동근 교수를 잊지 못하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시절에 발표했다는 논문 '신라의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는 사실 박동근 교수가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애초 김정일은 정치경제학부에서 공부를 했던 관계로 역사나 철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신라에 의한 3국통일 문제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박동근 교수가 오래전부터 북한 역사학계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지적해 오던 문제였습니다.

'신라에 의한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박동근 교수의 논문은 김정일이 빼앗아 자기 것으로 낸 것이 아닙니다. 박동근 교수가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문제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공식화하기 위해 김정일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누구를 이용하든 박동근 교수는 '신라에 의한 3국통일'이라는 문제를 '고구려에 의한 3국통일'로 뒤집는데 성공했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신라와 백제를 통일했고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게 박동근 교수의 주장이었습니다.

논문의 가치가 높게 평가됐기에 북한은 '고구려에 의한 3국통일'을 '김일성종합대학'시절 김정일이 쌓은 가장 높은 업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은 스승인 박동근 교수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제가 그의 집을 방문할 당시 박동근 교수는 조평통 서기국 부장이었습니다. '조평통'은 북한의 대남 전략 기구인 '조선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락위원회'의 약칭입니다. 박동근 교수의 집은 만경대 구역 광복거리에 건설된 호화주택이었습니다.

김정일이 직접 선물한 3층짜리 호화주택이었는데 아래층은 주차공간이 있었고 2층과 3층은 저택으로 이용했습니다. 키가 크지 않으나 점잖은 박동근 교수는 그날도 저희와 술상을 마주하고 '신라의 사대주의'를 열변을 토하며 지탄했습니다.

김정일의 스승들 중엔 박동근 교수처럼 특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북한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철의 도시 밤하늘에 붉은 눈 내리네'를 작곡한 손창세를 들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공훈예술가였던 손창세는 '6.25 전쟁'에 참가하고 인민군 협주단에서 근무했지만 1970년대 '당의유일사상체계'라는 숙청의 바람이 불 때 외가 쪽의 가정토대가 문제로 돼 함경북도 예술단 작곡가로 쫓겨 갔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오늘날 김정일이 지었다고 알려진 '조선아 너를 빛내리', '나의 어머니', '축복의 노래'는 모두 손창세가 직접 작사 작곡을 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손창세가 가정토대 문제로 인민군 협주단에서 쫓겨날 때 김정일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이 생전에 대학 동창들을 절대로 곁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도 북한의 간부들 속에선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신 주요 명절이면 대학 동창생들에게 '만청산연구원'에서 생산한 술과 당과류를 '선물'로 보내주곤 하였습니다.

김정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북한은 김정은과 대학생활을 했다는 동창들을 소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가 비밀에 싸여있고 두루뭉술해서인지 김정은의 미래도 뭔가 흐릿하고 앞날이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