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군절에 있었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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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창군절인 4월 25일을 맞으며 북한정권은 김정은이 참관한 가운데 사상 최대 규모의 군종합동타격시위라는 걸 조직했습니다.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이날 인민군 화력종합 시범훈련을 요란하게 보도했습니다. 사실 북한은 이번 창군절을 계기로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핵시설 타격을 거론하고 중국마저도 미국의 공격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김정은은 한 발 물러나 구닥다리 무기들을 꺼내들고 한바탕 객기를 부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북한의 창군절은 가슴이 섬뜩한 하루였습니다. 사실 1980년대 초까지 북한의 창군절은 인민군 창립일인 2월 8일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창군절은 4월 25일로 바뀌었습니다. 1983년 북한은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예술영화 ‘조선의 별’을 처음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과정에서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은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으로 화려하게 변신하게 됩니다. ‘조선의 별’ 제6부 ‘불타는 봄’이 그 절정이었습니다.

김일성도 자신이 쓴 미완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현지 주민들이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부대들을 보면 ‘고려홍군’이라고 환영했다는 내용을 서술했습니다. 실제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창군절이 인민군 창군일인 2월 8일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됐다는 4월 25일로 바뀐 것은 제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1986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엔 당시 새로 창작된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을 우상화한 다부작 예술영화 ‘조선의 별’ 제6부의 제목은 ‘불타는 봄’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김일성이 1930년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해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렸고 그에 기초해 1932년 4월25일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북한 당국은 예술영화 ‘조선의 별’에서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했다는 과정이 방영되자 그 내용에 발을 맞춰 발빠르게 기존의 창군절을 4월 25일로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창군절이 바뀐 배경을 두고 북한의 학계에선 논란이 많았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과 교수들도 조선인민혁명군이 실재한 조직이냐, 아니면 ‘조선의 별’ 대본을 쓴 영화문학 작가 종순의 머리에서 나온 허구냐를 놓고 수많은 논쟁을 거듭했습니다. 저도 그때 친구들과 밤을 새우며 진위논란을 벌렸습니다.

북한 당국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만든 영화 ‘조선의 별’은 당시 북한의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속에서 뜻밖에도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독서열풍을 몰고 왔습니다. 그만큼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조선인민혁명군이 실재한 조직이냐를 파악하기 위해 림춘추, 박성철, 황순희를 비롯해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회상기를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북한 당국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사태를 조기진화하기에 바빴습니다.

북한은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활동을 했다는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을 내세웠습니다. 1988년 4월 25일 빨치산 출신들 가운데서 제일 나이가 어린 황순희가 제가 공부하던 김일성종합대학에 나와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되던 나날들을 강연했습니다. 황순희는 그 당시 조선여성동맹 당위원장을 거쳐 노동당 중앙위 경공업부와 당역사 연구소 산하 “4,15 창작단”에서 사업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까지 꽤 젊었던 황순희는 마치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황순희의 강연을 지켜보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속에서 의문을 표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생물학부 장철수가 “황순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될 때 없었던 인물이 아니냐?”라고 주변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학생들이 쑤군거리기 시작하며 주변이 좀 소란해졌습니다.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김일성종합대학 당위원회 지도원과 청년동맹 위원장이 우리들 앞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분위기가 사못 긴장됐습니다. 그는 주변의 시선이 쏠리지 않도록 눈치를 봐가며 주변에 앉아있던 우리 생물학부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잘 못 걸려들었구나’ 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노동당의 정책을 설명하는 강연이 모두 그랬듯이 황순희 역시 질문을 받지 않고 자리를 떴습니다. 설령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질문이 허용된다고 해도 김일성의 존엄과 관련된 문제여서 누구도 감히 질문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연은 끝났지만 속은 정말 찜찜했습니다. 이제 대학 당위원회에서 부르면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혹시 거짓말이라도 했다가 드러날 경우 어떤 처벌을 받을지 두려운 생각에 저녁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저와 함께 대학 당위원회 지도원이 이름을 적어간 학생들 중엔 최연실이라고 남학생들 속에서 인기가 높던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데 그가 지키고 있었던 듯 출입문 쪽에서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녀를 따라 갔는데 식당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공원의 큰 나무아래에 이름이 적혀간 다른 학생들 7~8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설명도 없이 최연실이 직접 나서 앞으로 대학당위원회에 불려 가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럴 듯한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학부는 강의가 끝나면 통일거리 건설장에 지원을 나갔는데 마침 우리 생물학부에서 예술선전활동으로 건설자들을 고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황순희의 강연에 의문을 품은 게 아니라 학부에서 긴급하게 제기된 과제에 대해 몰래 논했다는 거짓말을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날 점심시간이 지나 저와 이름이 적혀 간 학생들에게 모두 대학당위원회로 모이라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대학 당위원회에서 출학당해 농촌으로 추방될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연한 걱정이었습니다.

장철수가 먼저 나서 당시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여학생들이 예술 활동을 벌릴 때 입을 의상을 대학생복으로 할 것인지, 노농적위대 군복으로 할 것인지를 논했다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장철수의 얘기에 지도원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중요한 강연이고 정치행사인데 그런 논의를 해서 주변에 소란을 피워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저희들의 예술 활동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태는 그렇게 별 탈 없이 무난히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번 4월 25일 북한의 창군절을 보내면서도 그 날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당위원회 지도원이 정말 속았는지, 아니면 알고도 속는 척을 했는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저는 대학 당지도원이 알면서 속는 척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위해서 모르는 척했다고 믿으며 늘 고마운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도 하지 않았던 조선인민혁명군,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일을 창군절로 기념하는 괴이한 나라 북한이 얼마나 존재할지 알 수는 없지만 남과 북이 통일되면 반드시 그날의 그들을 다시 만나리라 생각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세상에서 서로를 아낌없이 지켜주던 나의 많은 친구들, 아직도 철장 없는 감옥에서 속 한번 시원히 터놓지 못하고 살아 갈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