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농장의 실체 (4)

0:00 / 0:00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아미산총국이 존폐위기를 극복하고 북한전역으로 확대되던 과정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북한 전역으로 확대된 아미산농장들의 규모와 생산되는 제품 등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1970년대부터 김정일은 북한의 곳곳에 자신과 김일성을 위한 별장들을 세웠습니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노동당 내부의 여러 파벌들이었던 남노당파와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들과 싸움으로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종파라고 불리던 노동당 내부 파벌들은 1967년 노동당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갑산파’ 숙청을 끝으로 괴멸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에서 김일성의 유일적 통치가 시작됐습니다. 갑산파의 숙청은 김정일의 후계과정과 연관돼 있었습니다.

당시 빨치산 출신들을 앞세워 갑산파를 숙청한 인물은 김정일이었습니다. 1960년대 노동당에 입성해 선전선동부를 책임졌던 김정일은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북한의 매 가정세대들에 의무적으로 김일성의 초상화를 걸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박금철을 우두머리로 한 갑산파는 김일성의 우상화를 당내 민주주의 파괴행위로 규정짓고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에 김일성은 크게 분노했고 그런 틈을 노리던 김정일은 일격에 갑산파를 제거함으로서 후계자의 입지를 든든히 다졌습니다.

갑산파 숙청 과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부상한 김정일이 제일먼저 내놓은 것이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였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이 내놓은 사상을 김정일이 직접 집행한다는 것이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영도체계의 골자였습니다. 이후 김정일은 북한의 경치 좋은 곳마다 김일성의 별장들을 크게 건설했는데 이를 ‘만수무강’ 사업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일성의 만년장수를 기원한다며 ‘만수무강’이라는 구호를 들었지만 그 배후에서 김정일은 제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때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은 계절에 따라 이곳저곳의 별장들을 돌며 살았는데 삼복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면 백두산 일대의 포태특각, 가을서리가 날릴 때면 연풍호 특각, 겨울철이면 구월산 특각에서 업무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북한이 평양에만 한정돼 있던 아미산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들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면에는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별장들을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현지에서 싱싱한 먹을거리들을 긴급 보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북한은 여러 지방들에 김일성,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위한 ‘9호 농장’들을 따로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9호 농장’들은 지정된 한 가지 종류의 농산물에만 집중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치품 생산을 위해 지방들엔 ‘8호 작업반’도 있었습니다. 반면 지방에 있는 아미산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들은 모두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에 위치한 아미산총국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지방들에 있는 아미산총국 산하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들은 따로 대호가 정해져 있지만 비밀에 속해 있었습니다.

대호를 알 수 없었던 주민들은 지방에 있는 아미산총국 산하의 농장들을 통째로 아미산 농장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불렀습니다. 북한에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고위층 간부들을 위한 아미산 농장이 몇 개나 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던 양강도만 해도 내부에서 무엇을 재배하는지 알 수 없는 아미산 농장들이 수십 개나 되었습니다. 양강도 삼수군만 해도 고비농장’, 꽃사슴목장, 풍산개농장을 비롯해 아미산총국 산하의 목장과 농장이 세곳이나 되었습니다.

양강도 삼지연군에는 아미산총국 산하로 꽃사슴목장과 말사슴 농장이 따로 있었고 황기농장과 더덕농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개 군에도 2~3개씩 있는 아미산 농장들은 대부분 일반 협동농장의 한 개 작업반 규모 정도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이 일반 협동농장의 작업반 규모라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농업수단들은 일반 협동농장들을 능가했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자동차 한 대와 뜨락또르(트랙터) 2대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소를 기르지 못하게 했고 주변 다른 협동농장들에서 소를 빌려서 쓸 수도 없도록 규정돼 있었습니다. 소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 여러 가지 균에 감염될 수 있다는 구실 때문이었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 맑은 샘이 항상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 주변의 산골짜기로부터 맑은 시내가 흘러야 합니다. 아미산 농장의 위쪽에는 밭이나 주민들의 생활주거지를 만들지 못하도록 통제했습니다.

개인이나 협동농장 밭이 있으면 비료나 농약을 쓰게 되고 주민들이 거주하면 농작물 재배에 쓸 시냇물이 오염될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농장은 작지만 겨울철에 남새(채소)를 재배할 온실들이 있고 여름철에 채소를 가꾸는 밭이 따로 있었습니다. 아미산 농장과 목장의 종업원들은 북한에서 수십만의 아시자가 발생하던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중앙으로부터 어김없이 배급을 받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아미산 농장 주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농장 종업원으로 입지하여 배급을 받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미산 농장이나 목장에 취직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 종업원들은 농장장이나 분조장, 그리고 제대군인 남성 종업원들만 가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농장 일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아미산 농장 종업원들은 선발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가정토대였습니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아미산 농장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질병이나 전염병이 없어야 했습니다. 3달에 한 번씩 받는 종합검진에서 질병이 발견되면 퇴직시켰습니다.

여기에 남성들의 경우엔 제대군인이고 당원이 돼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기준이 적용됐습니다. 아미산 농장에서 일하던 제 친구 한 명은 친동생이 중국과 밀수를 하다가 걸려 2년간의 교화(교도) 형을 받자 도당위원회 간부과에서 퇴직을 시켰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에 종업원으로 선발되고 퇴직을 하거나 처벌을 받는 등 모든 생활은 각 도당위원회 간부과에서 관리했습니다. 그만큼 아미산 농장에서 일을 하려면 본인관리도 철저해야 하지만 주변의 가족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김일성 시대까지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겨울철 농작물 재배를 위해 주로 톱밥난로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각 지역마다 있는 건설사업소와 임산사업소, 목재일용품 공장들에서 톱밥이나 버리게 된 목재 절단품들을 땔감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겨울철 온실에서 농작물 재배를 위해 주변의 통나무들을 닥치는 대로 땔감으로 이용했습니다. 임산사업소도, 목재일용품공장도 모두 멎어선 상태여서 땔감을 공급받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제가 북한을 떠나던 당시까지는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에 석탄을 공급했습니다. 양강도에 있는 아미산 농장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콕스(코크스)탄을 사용했는데 화력조절을 위해 콕스탄을 가루 내어 진흙에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북한의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들을 위해 만들어진 아미산 농장, 지금도 북한의 특권층들은 아미산 농장에서 재배되고 사육된 식재료들을 마음대로 소비하며 살 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국통일은 아미산 농장과 같이 북한에서 특권층들을 위한 시설들이 없어지는 그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