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주치의사들(2) - 김용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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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 한국 정부는 남한에 정착해 살고 있는 3만 여명의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설문조사란 이미 여러 가지 질문이나 정답이 적혀 있는 문제지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과 가장 일치 하는 문단만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여론 조사방법입니다.

탈북민들을 상대로 한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북한 내부와 관련된 여러 질문들이 실렸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북한의 의료체계는 무상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탈북민들의 답변은 하나 같이 '아니다'였습니다.

북한에서 무상치료제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고 지금은 돈이 없으면 병이 나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탈북자들은 증언했습니다. 북한에서 무상치료제는 몇몇 고위간부들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탈북민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무상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고위층이라 해도 직급에 따라 대우는 천차만별입니다. 대부분의 간부들은 고위층이라 해도 본인에게만 무상의료 혜택이 차례집니다. 하지만 김정은과 지도층 급 간부들은 주치 의사까지 항상 따라 붙습니다.

사망한 김일성과 김정일에겐 심혈관과 신장을 비롯해 인체의 주요 장기들을 항시적으로 관찰하는 주치의사가 7~8명이나 따라 다녔습니다. 만청산연구원에서 연구사로 근무하던 저는 김일성의 주치의였던 홍건의 박사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홍건의 박사에 대해선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드렸지만 김일성의 첫째가는 주치의 로서 심장내과 전문 의사 김용서 박사도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해 북한 주민들이 아직까지 의문을 감추지 못하는 부분이 그 당시 김용서 박사의 해임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제일 뛰어난 심장내과 전문 의사였던 김용서 박사는 김일성의 심장쇼크를 두 번이나 인공호흡만으로 살려낸 실력자였습니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 김용서 박사는 평양시 대동강구역에 위치한 군의대학 출신입니다.

군의대학에서도 성적이 늘 우수한 김용서 박사는 과학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북한의 조치로 1950년대 독일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유학생활을 마친 후 김용서 박사는 독일에 다시 연구생으로 파견되어 준박사와 박사 칭호를 받았습니다.

9년 동안 두 번씩이나 동부 독일에서 연수과정을 거치면서 심장질환에 대한 응급 치료법을 확립한 그는 북한으로 귀국 후 봉화진료소에 배치되어 한동안 의료 활동만 하면서 충분한 현장 경험을 쌓았습니다.

현장경험을 통해 북한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능력을 보유하자 즉각 봉화 진료소 소속 김일성의 주치의사로 선발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주치의라는 신임과 믿음을 받으며 잘 나가던 김용서 박사에게도 시련이 닥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3년 가을, 김용서 박사는 뜻밖에도 봉화진료소 의사 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봉화진료소에서 해임은 한마디로 김일성의 주치의에서 해임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해임 사유는 김일성의 병력서를 분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에 있는 봉화진료소는 호위사령부가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내부 곳곳에는 무인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습니다. 또 국가보위부가 매 의사들을 감시하고 있어 김일성의 진료기록이 사라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사고였습니다.

주치 의사에서 해임된 김용서 박사는 믿을 만한 친구에게 "수령님의 병력서를 내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고 하소연 했다는 일화는 주변 의사들과 간부들 속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 주치의를 해임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김정일뿐이었습니다. 김용서 박사가 해임되던 시기에 봉화진료소 소장은 리낙빈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리낙빈 소장에게 지시하여 김용서 박사를 해임시켰습니다.

김용서 박사를 잘 알고 지낸 한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당 상급(윗)조직 에서는 봉화진료소에서 해임된 그를 고향인 의주에 가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평양에 있는 조선컴퓨터센터에서 일하기를 희망했습니다.

당시에 컴퓨터센터 연구과제 중에 심혈관 계통에 대한 진단과 치료에 대한 프로 그램 연구개발 과제도 들어있었습니다. 김일성의 병력서를 분실하여 해임된 김용서 박사를 조선컴퓨터센터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심혈관계 질환으로 고생하던 김정일은 직접적인 의사가 아닌 의료 연구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최근 선진국들에서는 슈퍼 컴퓨터를 이용하여 성인 병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심장과 뇌혈관질환, 암의 진단과 치료에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조선컴퓨터센터에서 심혈관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위한 수학적 모형화와 그에 따른 프로그램 개발연구는 김용서 박사의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다만 김용서 박사의 진단 시스템이 완성되기 전인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이 사망하여 그의 연구가 빛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해외의 많은 의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지금도 김일성의 사망에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1997년 조선노동당 출판사에서 출판한 덕성실기인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에 실린 전하철의 기록에서도 김일성의 사망관련 의혹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도서에 수록된 김일성의 사망 3일 동안의 기록을 살펴보면 묘향산 특각에서 경제일꾼 협의회 후 김일성의 심기와 급작스러운 심근경색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비한 주치 의사들과 의료진들의 준비상태가 허술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7월 5일에 김일성은 아침부터 밤 12시가 다 되도록 경제부문 책임일꾼협의회에 참가하였고 다음날인 7월 6일에는 협의회 내내 심중한 안색으로 일꾼들이 사무실에 앉아 말공부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며 추궁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가슴이 답답하다며 손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기도 했고 부관에게 담배를 달라고 하여 한 대 피우며 '요즘 잘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피우고 있다'며 초조한 마음을 보이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심근경색의 초기 단계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김일성에게 필요한 심장과 혈관계통의 유명한 주치 의사들이 묘향산에 없었던 것입니다.

홍건의박사는 뇌 혈전으로 쓰러진 상태이고 김용서 박사도 해임된 상황에서 김일성을 응급치료 해야 할 시간을 놓치게 됐습니다. 전하철의 기록만 보면 김일성이 사망 전까지는 건강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주치의였던 김용서의 증언은 달랐습니다.

김일성은 과거부터 심장 부정맥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김용서 박사는 김일성의 사망 현장에 주치 의사조차 없었던 것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해고 되지 않고 주치의사로 있었다면 그날 김일성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일성이 가게 된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나 동행하여야 하는 주치 의사들이 왜 사망할 시각에 그 자리에 없었는지, 그리고 김일성의 심혈관계 질환을 잘 알고 있는 김정일이 왜 김용서 박사를 해임했는지 아직은 모든 내막이 장막에 감춰져 있습니다.

언제인가 북한에도 민주화의 시대가 오면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한 모략들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제 아버지인 김정일의 사망을 이틀 동안이나 감추고 보도조차 하지 않았던 김정은도 절대로 그런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