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리 백도라지농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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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아미산총국 산하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 백도라지농장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편에 붙은 ‘백도라지’라는 이름도 보천군에서 시작됐습니다. 전 시간에 이어 오늘에는 아미산총국 산하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 ‘백도라지’ 농장에 대하여 준비했습니다. 양강도 보천군은 북한에서 제일 먼저 아편재배를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청림리는 백도라지 종합농장으로 지정돼 있었습니다.

청림리는 양강도 보천군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농촌으로 호산리와 내곡리, 보천읍과 삼지연군 통남노동자구와 인접해 있습니다. 청림리(靑林里)라는 이름은 분비와 가분비, 잣나무와 같이 사철 푸른 삼송나무가 많다는데서 유래됐습니다. 청림리는 철도가 없어 인적은 드물지만 ‘푸른봉’을 비롯해 주변 산들이 경사가 완만해 축산을 하기에 적합한 지형으로 알려졌습니다. 1960년대 말 김정일과 함께 양강도를 현지지도 한 김일성은 청림리에 양을 방목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양떼가 구름처럼 흐르는 대자연 목축지로 청림리를 전변시키려던 김일성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양강도의 간부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축방역이 발전하지 못하다나니 집단 목축에 따른 양떼의 폐사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양 방목을 포기하고 옥파(양파)농사를 지어 소련에 팔려했지만 수출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말 김일성이 중흥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면서 보라콩을 많이 심으라는 지시를 내리자 청림리는 보라콩 농장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보라콩은 메주콩에 비해 수확량도 적고 농작물로서 수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청림리는 수많은 도전에 모두 실패하고 양강도의 다른 농촌들과 마찬가지로 감자를 전문적으로 심는 협동농장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청림리에 기적이 일어난 건 1991년이었습니다. 보천군 의화리에서 아편농사에 성공한 북한은 청림리를 시범적인 아편농장으로 지정했습니다. 아편농사에 성공한 의화리를 두고 청림리를 아편농장으로 정한 덴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북·중 국경에선 밀수가 한창 성황을 이루고 있었는데 보천군 의화리는 중국과 너무 가까웠습니다. 의화리는 보천군과 혜산시를 잇는 대목이기도 하고 또 김일성 전용의 ‘1호 도로’가 있어 자칫 외국의 정상들도 이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참작돼 북한은 결국 철도가 없고 외지인들이 잘 찾지 않는 보천군 청림리를 아편시범농장으로 지정했던 것입니다. 김일성 빨치산 출신들이 아편을 많이 사용했던 사정도 보천군 청림리가 아편농장으로 지정되는 계기로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빨치산 투쟁을 하던 시절 일제가 점령한 만주는 주민들의 주요 수입이 아편이라고 할 만큼 아편농사가 일반화돼 있었습니다. 산속에 숨어 지내던 김일성의 빨치산은 의약품을 구할 수 없어 손에 넣기 쉬운 아편을 비상약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다나니 김일성의 빨치산 출신들 가운덴 아편중독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청림리 원주민들은 돈 벌이를 위해 일제 강점기부터 몰래 아편을 키워왔는데 해방 후인 1960년대까지 소규모로 아편을 재배해 빨치산 출신들에게 보장해왔습니다.

빨치산 출신들이 김일성에게 보천군 내곡 온천에 휴양을 다녀오겠다고 조르면 김일성은 주변 청림리에서 재배하는 아편이 생각나서 그러냐며 농담까지 했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로 보천군 청림리는 아편재배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훗날 북한은 함경남도 단천시에 의료용 아편을 재배하는 농장을 만들면서 보천군 청림리에서 아편을 재배하던 작업반을 해체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참고 돼 북한은 보천군 청림리를 아편재배에 제일 적합한 지역으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보천군 청림리가 아편을 재배하는 시범농장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은 이곳 주민들에게 그리 반갑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가을철이면 1년 먹을 식량을 현물로 분배 받는 협동농장과 달리 아편농장은 종합농장으로 전환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종합농장은 국영농장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종합농장에 소속되면 농민이 아닌 농업노동자로 규정돼 매달 월급과 배급을 받게 되는데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종합농장 노동자들에게 식량과 월급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돈을 물처럼 쏟아 부은 북한의 후유증은 종합농장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습니다. 월급과 배급을 보장하지 못하면서 종합농장 노동자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뙈기밭에 의지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청림리와 인접한 삼지연군 중흥종합농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한때 남들이 부러워하던 중흥종합농장의 몰락을 지켜 본 청림리 사람들이 자신들의 협동농장도 곧 국영종합농장으로 전환된다는 소식이 전혀 반가울리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1991년부터 보천군 청림리는 종합농장으로 변신해 아편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믿기 힘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북한은 다른 종합농장들과 달리 아미산 총국에 소속된 청림리에만 특별히 매달 월급과 배급을 정상적으로 보장해주었습니다. 배급도 당시 입쌀 30%, 잡곡 70%였던 일반 주민들과 달리 100% 입쌀로만 제공됐고 한 달에 식용유 1kg씩 정상 공급됐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아편수확이 끝나자 작업반장, 노력혁신자들에게 고급양복지가 무상으로 제공됐습니다.

1991년 청림리에서 가공된 아편은 70kg을 훨씬 웃돌았습니다. 게다가 아편 씨는 고소하고 영양가가 높아 아이들의 간식으로 좋았고 참깨나 들깨를 대신할 조미료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아편 씨는 싹이 틀 수 없게 불에 닦아서 팔 수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보천군 주민들이 총동원돼 아편농장에 거름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청림리 주민들은 일을 하지 않고도 배급과 월급, 식용유까지 공급을 받으며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괜히 품을 들여 뙈기밭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농사가 잘 안되면 현물분배의 량이 적어 늘 뙈기밭에 관심을 가져야 했고 산림보호원들로부터 뙈기밭을 빼앗기면 술과 고급담배를 뇌물로 바치고 뙈기밭을 되찾던 근심도 덜게 되었습니다. 1992년엔 첫해보다 더 많은 아편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가로 청림리 백도라지(아편)종합농장의 간부들은 대동강 반도체 텔레비죤(TV)을 무료나 다름없는 ‘우대상품’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은 의화리와 청림리의 경험을 토대로 1993년부터 보천군의 모든 협동농장을 아편농장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러나 청림리를 제외한 다른 협동농장들은 종합농장으로 전환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관계로 하여 협동농장들은 아편을 심으면서 한두 개의 작업반을 ‘생산작업반’으로 만들어 가을철 농민들에게 현물분배를 줄 식량을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청림리만의 특별한 배려는 이곳 주민들을 타락의 함정으로 내몰았습니다. 1992년부터 아편 중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평범하고 부지런했던 주민들도 뙈기밭 농사는 모두 팽개친 채 몰래 아편을 채집해 외지에 팔아먹는데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편은 1 그램 당 북한 돈으로 60원으로 몰래 거래되었는데 사무원의 평균 월급이 백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편에 취해 아미산총국만 쳐다보던 청림리 주민들은 앞으로 얼마나 무서운 재난이 들이 닥칠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에서 가장 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보천군 청림리,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 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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