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부세습과 권력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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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제도를 만들어 낸 김씨 일가와 고위권력층의 생활을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일체 사유 재산을 없애고 인민대중을 골고루 잘 살게 만든다는 것이 사회주의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맞게 무엇이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사회를 공산주의라고 합니다.

아마 북쪽에서 살고 계신 여러분들은 지금도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만든다던 김일성의 ‘꿈’은 1990년대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 붕괴와 자본주의 복귀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경제적 혼란과 외국에 나갔던 유학생들의 대대적인 망명, 그리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90년대 중반엔 거리에 시체가 나뒹굴고 사람들은 북한을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엔 당중앙위원회 국제비서였던 황장엽이 탈북, 남한에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체제유지에 급급했던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총소리를 내라’는 지시를 내렸고 혜산시와 신의주시, 청진시 등 북한의 주요 도시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공개처형이 시작됐습니다.

혜산에서는 1999년 보위사령부 7처 부처장 김종은이 책임지고 대대적인 숙청과 공개처형을 진행하였습니다. 중국연고자 장사꾼들을 포함하여 도당조직부와 검찰소, 도보안국 간부들도 처형의 대상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정책이나 체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을 배척한 간신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책임을 떠넘겨 버린 것입니다.

또 북-중 국경을 이용해 중국에서 공산품들을 들여다가 장사를 하던 박정숙과 홍옥 등 12명이 ‘비사회주의 반동분자’로 한 번에 공개 총살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혜산 시에서만도 200여 명이 처형되었는데 도보안국 수사처장 등 많은 사람들을 보위사령부 구류장에서 도끼로 머리를 치는 ‘도끼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은 이런 대량 공개 처형을 통해 중간 간부들에게는 폭군의 공포성을 보여주고 인민들에게는 간신들을 가차 없이 처벌하는 ‘인민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부각시켰습니다. 동, 인민반에 침투해 간부들이나 잘사는 사람들을 요해하여 마치나 주민들이 바라는 대로 처형한다고 하였지만 사실 당시 고위특권층들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칼 가진 자의 허세에 충만돼 있었습니다. 당시의 북한은 큰 도둑이 좀도둑을 ‘나쁜 놈’이라고 꾸짖고 극형에 처해버리는 세상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것처럼 성분과 토대로 계층을 분리하고 불평등한 삶을 조성한 북한 사회는 물과 기름이 함께 공존하는 모순된 사회입니다.

북한은 헌법 제65조에 ‘공민은 국가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누구나 다 같은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국이 내세우는 온갖 선전 구호만 보면 북한 주민들은 평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의 지시로 1966년 4월부터 1년 동안 실시한 ‘주민재등록사업’ 결과를 토대로 모든 주민들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의 3개 계층, 51개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류된 각각의 성분에 따라 의식주 배급에서부터 사회적 이동과 법 집행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 정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차별 앞에서 좌절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대학교수, 중학교 교사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는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1980년 처음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과학도서관에서 열린 전국수학경연대회와 전국외국어경연대회에서 3개월 동안의 도 경연을 거쳐 양강도 대표로 참가하게 됐습니다.

김 대에서 경연에 참가한 이후에 희망대학이 김일성종합대학으로 굳혀졌지만 그건 저의 꿈에 불과했습니다. 저와 동년동창인 도당책임비서, 시당책임비서, 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의 아들 등 간부자녀 9명이 우선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추천받았고 그들보다 성적이 우수했지만 저는 나진해운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러가게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17살, 그 어린 나이에 부모가 간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꿈이 짓밟힌 게 너무도 서러워 역전공원에 나가 혼자 울던 생각이 떠올려집니다.

다행히 경연대회에서 성적이 전국 경연적으로 3등권 안에 들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추천서를 받고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도 인민위원회 교육국에서 찾는다고 하여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육국장방에 들어갔을 때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시험 대상자로 선정됐다고 말하던 국장의 목소리와 손에 받아든 입학시험 응시 확인서를 받아들고 눈물을 쏟아졌던 그날의 일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저는 주변 동기생들의 부모 권력을 위시한 허세에 힘이 빠져 정신적 모순에 허덕이게 됩니다. 외교관인 아버지와 해외에서 학교도 다녔던 친구들은 우리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외국제 양복이나 운동복을 입고 제노라(내로라) 뽐냈고 흔들대는 몸에서 풍기는 이상야릇한 외국제 향수냄새는 나의 숨소리도 흐느낌으로 들리게 만들었습니다.

국토환경보호상을 지낸 김경준도 같은 생물학부 실험생물학과 동기여서 저와 함께 공부를 하였습니다. 김경준은 할아버지가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투사였고 아버지는 중앙당 행정간부부 김시학 부장, 본인도 남산 중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북한에서 권력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와 같은 권력가의 자녀들은 항상 주변에서 친구들이 은근히 가까이 하려고 애썼고 부모들의 권세를 믿고 자신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식도 김정일의 배려로 선물결혼상을 받고 경흥결혼식당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누구다 다 거쳐야 하는 3년 동안의 3대혁명 소조도 나가지 않고 국가과학원 청년동맹1비서로 사회생활의 첫 출발도 멋졌습니다.

특권 계층의 고속승진은 2004년 1월 국토환경보호성 부상에서 2013년 4월 국토환경보호상, 2014년 3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경준은 2012년 5월 12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김정은 노작인 '사회주의 강성국가건설의 요구에 맞게 국토관리사업에서 혁명적전환을 가져올 데 대하여' 발표에 대한 호소성 출연, 2013년 7월 26일에는 김정은과 함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했습니다.

또 2013년 8월 14일에는 룡악산 대 보통강 선수단의 남자축구경기 관람을 김정은을 동행해 참석했고 올 9월 3일부터 15일까지는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남아프리카에서 진행된 제14차 세계산림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세계는 18세기 봉건왕조 국가에서나 볼 듯한 3대 세습이 21세기에 이뤄진, 북한이라는 국가를 의아함을 넘어서 동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민들은 죽거나 말거나 오직 고위특권층들만의 낙원을 만들고 부익부, 빈익빈의 지옥이 된 북한에선 여전히 김경준과 같은 ‘뼈다귀를 잘 만난’ 특권층 자녀들이 부모들의 권력세습을 이어받아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재능이 있어도 권력에 눌려 정해진 자기 삶의 테두리 안에서 인생을 끝내야하는 북한의 절대 다수 백성들이 언젠가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것에 대한 정당을 대가를 받고 또 권력 앞에 좌절할 필요가 없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