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을설의 사위 박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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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 여러분, 11월 7일은 인민군 원수칭호를 받고 호위총국 사령관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빨치산 출신 리을설의 사망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두 번에 걸쳐 김일성의 전령병 출신 리을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청취자 여러분들이 잘 아는 리을설은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존재를 잘 드러냈습니다. 리을설이 사망한 다음날 김정은이 직접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리영길 총참모장을 데리고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은은 "수령님의 가장 충직한 혁명전사였으며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 전우였던 리을설 원수동지를 잃은 것은 커다란 손실"이라며 "당과 조국에 무한히 충실했던 혁명가의 빛나는 삶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언급했습니다.

리을설의 사망을 추모하기 위해 김정은은 5일간의 국장를 지시했고 조기를 띄우며 일체 가무와 유희, 오락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북한의 언론들은 빨치산 출신 리을설에 대한 김정은의 예우를 통해 백두혈통을 선전하기에 바빴습니다.

리을설은 이렇게 김일성으로부터 시작해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김씨 봉건왕조를 지켜 온 사환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을설을 한없이 고지식한 충신이거나 청렴결백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리을설은 당과 수령의 충직한 전사라기보다 흔히 북한의 인민들이 말하는 '살줄을 아는 사람', 이렇게 평가를 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리을설이 직권을 악용해 자식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앞장선 사실은 북한의 간부들속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씨 일가의 3대 세습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빨치산 출신들도 권력을 대물림한다는 사실을 북한에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은 잘아시리라 봅니다. 리을설 역시 다른 빨치산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자식들에게 막대한 부와 권력을 대물림했습니다.

리을설의 셋째 사위가 박명국이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직업은 외국에 직접 드나들 수 있고 달러를 만질 수 있는 외교와 무역 분야의 간부직입니다. 리을설은 슬하에 아들이 한 명도 없고 딸만 4명씩이나 됐습니다.

그중에 셋째 딸 리춘희가 가장 똑똑했고 그의 남편인 박명국이 제일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박명국은 외무성 미국국 과장을 거쳐 오스트랄리아(호주)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로 지금은 외무성 부상으로 김정은 정권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리을설은 젊은 시절 여성문제로 하여 김일성으로부터 곤욕을 많이 치렀습니다. 일각에서는 리을설의 여성편력이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이라고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아직 봉건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병폐로 오인됐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들을 얻지 못했지만 그만큼 사위들에 대한 리을설의 기대는 컸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격이 활발하고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시켜 남다른 인물로 관심을 받았던 셋째 사위 박명국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여러모로 간부사업에 관여했습니다.

평안북도 출신인 박명국은 신의주에서 외국어학원을 졸업하고 평양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한 뒤 리을설의 셋째 딸 리춘희와 결혼했습니다. 그 후 리을설의 도움을 받아 1989년 나이지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2등서기관으로 배치 받아 근무했습니다.

이런 배경에다 1990년대 중반 호위총국장으로 승진한 리을설의 거듭되는 방조로 1997년 3월에는 외무성 미국국 과장으로, 2006년에는 오스트랄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로 2년간의 체험을 거친 후 외무성 국장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박명국은 오스트랄리아에서 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면서 중앙의 허가 없이 한국의 한 신문사 기자와 전화통화를 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다른 사람 같으면 열 번 목이 날아갔을 법한 행동이었음에도 장인인 리을설이 있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명국이 공사로 재직하던 2007년 11월에 북한은 오스트랄리아 정부에 대사관을 폐쇄하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리고 2008년 2월 4명의 외교관들이 생활하던 오스트랄리아 주재 북한 대사관을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당시 오스트랄리아 외무부 대변인은 외신기자들과 다른 나라 대사관들에 "북한이 대사관 폐쇄에 대한 정치적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면서 "앞으로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이 업무를 대신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박명국은 동포신문인 '호주동아'와 전화통화에서 "2002년 5월 8일 양국의 쌍무외교협정 체결 후 우리는 대사관 개설 등 협정을 준수하였으나 오스트랄리아 정부가 핵 문제 등을 이유로 외교활동을 제약해 왔다"고 반박했습니다.

오스트랄리아에서 사귀어 온 한국인 동포를 만난 자리에서 박명국은 "재정적인 이유로 부득이 철수하게 됐다"고 솔직히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당시 오스트랄리아 정부와 북한 당국의 태도와 관련해 여러 나라 언론들은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북한은 오스트랄리아와 외교관계를 맺은 지 1년이 되던 2003년에 150㎏의 마약을 밀반입하려다 적발돼 화물선 '봉수호'를 오스트랄리아 정부에 빼앗겼습니다. 오스트랄리아 정부는 F-111 전투기를 동원해 화물선 '봉수호'를 침몰시켰습니다.

당시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은 "우리가 봉수호를 격침시켜 마약밀매에 대해 얼마나 격분하고 있는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은 아주 적절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압박수위도 계속 높여왔습니다.

박명국은 2006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회복할 데 대한 임무를 받고 오스트랄리아에 파견되었으나 이미 때를 놓친 시기였습니다. 대신 해외동포 김요한 씨가 신의주에 배터리재생공장을 지어주고 유리섬유공장에 투자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김요한 씨는 오스트랄리아에서 가까운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동포사업가였습니다. 북한이 어려울 때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는데 그런 고마운 분에게 사기를 친 박명국의 죄행은 해외를 넘어 북한 외교계까지 경악케 했습니다.

박명국은 대사관 공사로 오스트랄리아에 머물면서 그곳에 살던 김요한 씨의 딸과 가까웠습니다. 딸을 만나러 온 아버지 김요한 씨와 자리를 같이하는 기회도 여러 번 있었는데 박명국의 활발한 수완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박명국은 대사관 공사로 부임돼 북한을 떠날 때 딸 박은별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는 딸이 눈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긴급히 필요하다며 김요한 씨로부터 빠른 시일 안에 갚아준다는 조건으로 수천 달러를 빌렸습니다.

그때는 북한이 이미 내부적으로 오스트랄리아에 있는 대사관을 철수한다고 결정한 시기였습니다. 대사관 철수를 앞두고 박명국은 자신이 조국이라고 부르는 북한을 아낌없이 도와준 해외동포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사기행각을 벌렸던 것입니다.

그런 뻔뻔스러운 사기꾼이 지금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 자리에 올라앉은 리을설의 사위 박명국입니다. 박명국은 올해 2월 러시아 정부와 탈북자들을 심사 없이 추방한다는 '불법 입국자 및 불법 체류자 수용•송환에 관한 정부 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러시아를 방문해서는 또 누구를 상대로 어떤 협잡을 쳤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런 사기꾼이 북한의 외교문제를 관리하는 수장이라고 하니 김정은의 곁에 정말 사람이 없긴 없나 봅니다. 박명국이 지휘하는 북한 외교는 불 보듯 뻔합니다.

북한 전문가들은 아직 외교적 경험이 없는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에 집착해 무모한 도발을 일삼으면서 북한의 고립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결론을 내는데 설령 핵과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김정은의 외교는 결과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리을설이 밀어준 셋째 사위 박명국과 같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민족도 안중에 없는 자들이 북한에서 권력의 자리에 틀고 앉아 있는 한 국제무대에서 김정은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는 차례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