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성분(신분)세탁과 시인 장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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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은 북한에서 어떤 계층에 속해 있습니까?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김일성은 1960년대 피비린내 나는 종파청산을 연이어 감행했습니다.

종파청산 후 김일성은 전 사회적으로 성분제도라는 것을 조작해냈습니다. 출신성분, 사회성분에 따르는 토대, 김일성이 조작해낸 성분제도는 북한 주민들을 봉건적인 신분차별로 구분하고 대를 어어 노예의 멍에에 얽매어 놓았습니다.

조상이나 친척들 중에 과거 지주나 자본가가 있었다면 적대계급으로 분류되어 대대손손 차별을 받아야 하는 제도가 북한의 성분제도입니다. 일단 적대계급으로 분류된 계층은 농촌이나 광산, 북한 사회의 가장 어려운 부문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이런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적대세력에서 충성세력으로 성분세탁을 하려는 주민들이 북한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성분세탁에 성공한 인물로 북한의 유명한 시인 장혜명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1967년 북한에 출신성분과 사회성분이라는 것을 도입해 3계층 51부류로 모든 인민들을 구분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 인민들 속에서는 조상타령이 생기고 백두산줄기, 한라산줄기, 낙동강줄기 등 다양한 줄기라는 말들이 생겨났습니다.

3대 계층은 ‘핵심계층’과 ‘동요계층’, ‘적대계층’의 3가지를 뜻하며 51개 분류는 이를 더 세분화한 문서를 뜻합니다. 자신의 계층이나 친척들의 동향, 가족내력이 본인도 모르게 비밀리에 종합되어 당, 사법기관에 문서화됐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노동당 간부나 인민보안부 주민등록과에 보관된 성분문서들을 볼 수 있으나 힘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뇌물을 주어야만 해당 보안서 주민등록과에 보관된 자신의 출신성분 자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간부면 자식도 간부로, 부모가 노동자나 농민이면 자식도 그 성분을 이어 받아야 하는 세습화된 노예제도가 북한의 성분제도입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성분에 얽매어 이런 제도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봉건시대 말기 상놈의 자식이 돈을 주고 양반으로 둔갑하듯이 북한에도 드물기는 하지만 성분토대가 동요계층에서 핵심계층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장혜명이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장혜명은 양강도 풍서군에서 중학교 국어교원(교사)로 생활했습니다. 풍서군에는 일제시대 한국 향토문학의 대표 시인이었던 정지용 선생의 아들 정국영이 살고 있었습니다. 장혜명의 시인 생활에 정국영은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장혜명은 시를 즐겨 썼으나 북한에서 공식적인 시인이 아니었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통일의 광장에서’, ‘그날을 위하여’를 비롯한 통일을 주제로 한 시를 연이어 발표해 문학계에 크게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정일은 장혜명이 쓴 시 ‘통일의 광장에서’와 주옥양이 쓴 시 ‘어디서나 백두산에 오르리’를 읽고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들을 모두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서 공부하도록 특별히 배려했습니다.

그러나 창작에 너무 몰두하던 젊은 여류 시인이었던 주옥양은 북한 당국이 남포시 와우도에 작가들의 창작터로 마련해 준 ‘우산장휴양소’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장혜명만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에 대한 사랑은 대학 재학기간에도 남달랐습니다. 일요일이나 명절날 다른 대학생들이 휴일을 즐길 때에도 장혜명은 대학도서관이나 인민대학습당에서 푸쉬킨 시선, 톨스토이 작품, 과학서적 등 많은 책들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런 정열로 대학 2학년 때에는 광주인민봉기를 주제로 시초를 내놓은 데 이어 대학 4학년 때에는 항일혁명열사릉 시초를 내놓아 김정일의 입맛을 잘 아는 북한선전선동의 하수인으로, 적색시인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어문학부에는 항일빨치산의 후손이고 노동당 대남연락소 책임자였던 오극열의 딸 오혜선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오혜선은 장혜명의 글재주에 반해 백년가약을 맺었고 이로 하여 시골내기 청년은 백두산줄기로 출신성분이 전환되었습니다.

오극렬의 아버지인 오중성은 김일성과 빨치산에서 함께 지낸 사람이었고, 김일성을 죽음에서 구해준 것으로 소문난 오중흡은 그와 4촌간입니다. 그런 탓에 오극열은 1967년 37세의 나이에 공군사령관으로 등극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인민군 총 참모장으로, 1980년대에는 소련 프룬제 명칭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 대장으로 출세하였습니다. 1990년대 북한이 소련의 프룬제 명칭 군사학교 출신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숙청할 때에도 오극열은 살아 남았습니다.

김일성과 오중흡 일가의 끈끈한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김정은 정권에서도 오극렬은 여전히 북한의 특권상위층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극렬의 아들 오세현은 조선자원투자개발은행 중국대표로 북·중 무역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 이은 김정은의 3대 세습독재는 ‘백두혈통’이라는 봉건적 왕조세력에 뿌리를 두고 기생하고 있습니다. ‘백두혈통’의 지류인 ‘빨치산줄기’와 ‘낙동강줄기’도 대를 이어 세습독재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한갓 평범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장혜명이 문학이라는 명성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고 결혼이라는 방법으로 ‘빨치산줄기’에 수줍게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한 장혜명은 시를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2001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2008년에는 ‘6·15 민족문학인협회’ 북측대표단장으로 한국의 문학인들과 '통일문학'을 창간하는데 몰두했습니다. 지금은 노동당 통일전선 부 국장으로 대남적화 선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장혜명은 저와 같은 양강도 출신이고 대학시절 양강도 풍서군으로 가려면 혜산시를 거쳐서야 하는 관계로 혜산 역 전에 있던 우리 집에서 많이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혜명이라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혜선과의 교제가 없었던 장혜명은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에게 미친 젊은 시인에 불과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잘 쓴 시 한편이 수백 개의 포탄보다 더 위력이 있다는 김일성의 말에 푹 매료돼 있었습니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정열과 자신감이 높았다는 의미입니다. 2002년 이산가족 상봉 때 일제 시대 향토시인이었던 정지용의 아들 정국영이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정지용은 6.25 전쟁 때 북한에 끌려가던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당국은 정지용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정국영을 풍서군의 깊은 산골로 추방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산골에 추방되었던 정지용 시인의 아들 정국영이 양강도 방송위원회 풍서군 주재기자로 등장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상봉하기까지는 장혜명의 도움이 컸습니다.

풍서군에서 문학의 꿈을 안고 정국영과 각별한 사이었던 장혜명은 북한이 정지용의 아들을 찾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시인으로 남다른 매력을 뽐내며 ‘빨치산줄기’와 연분을 맺고 성분까지 세탁했음에도 장혜명은 시인으로써 크게 이름을 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시를 거의 쓰지 않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문학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장혜명, 결국 김씨 세습봉건왕조를 떠받드는 도구로 전락한 자신의 서글픈 자화상을 보며 이제

위선으로 가득 찬 펜대를 꺾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