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교류와 사람들> 시간입니다. 진행에 노재완입니다. 남한 사람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도 벌써 6년이 다 됐습니다.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오늘은 금강산관광 시절 현지에서 관광 안내를 했던 남측 안내원 정성혜 씨를 만나 봅니다. 지난 3일 RFA 서울 사무실에서 만난 정 씨는 "지금도 금강산이 그립다며 관광이 재개되면 다시 금강산으로 달려가 관광 안내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기자: 안녕하세요?
정선혜: 네, 안녕하세요.
기자: 지난달 23일죠. 광화문 광장에서 5.24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 때 직접 나와 시민들에게 눈물로써 호소하기도 했는데요. 그때 심정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정성혜: 네, 5.24조치 철회 촉구 집회 전날 남북경협 관련 일을 했던 청년이 나와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을 때는 난생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저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남북교류를 위해 일한 일꾼으로서 지금의 금강산관광 중단 장기화와 얼어 붙은 남북관계가 너무나 가슴 아프고 정부의 대처가 정말 원망스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기자: 금강산을 다녀온 1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다 어디 계시냐,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해 함께 해달라는 그 절규의 목소리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저도 현장에 있었는데요. 들으면서 마음이 무척 무겁더라고요.
정성혜: 금강산 관광객 분들께서 입국 절차를 밟을 때 핸드폰, 라디오, 망원렌즈 등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되는 것들도 많아 외국 나가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말씀들도 많이 하십니다. 또 군사분계선을 넘어 갈 때나 북한 군인들을 보면, 많이 긴장도 하시고요. 그러나 천하제일경치 금강산을 보시고 산에서 또 식당에서 북한 안내원들을 만나신 후에는 불편함의 말씀보다 감동의 말씀들을 더 많이 하십니다. 억지로 금강산에 보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스스로 다녀오신 분들이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또한 이런 역사적인 현실이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들이 있었고요. 무조건 막아 놓고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키고 있는 것은 100만 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을 다녀온 그 분들의 의미 또한 퇴색시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기자: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나서 그동안 어떤 일을 하며 지내셨습니까?
정성혜: 출산과 육아로 잠시 쉬었다가 일을 시작하려 했는데요. 제가 하고 싶었던 또 잘 할 수 있었던 일은 남북교류와 남북경협 일이라 오래 찾아보고 기다렸지만, 할 수가 없어 어렵게 대학원에서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해 사회복지단체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인성교육과 인식 개선 교육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모두가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당시 많이 힘들어 했을 것 같은데요. 어땠습니까?
정성혜: 2008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을 때는 출산과 육아로 일을 잠시 쉬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렇게 장기화 될 것이라 전혀 생각 못 했고요. 금방 재개될 것이라 여겼으나,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하나 둘씩 급여도 오랫동안 받지 못 하고 일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었고, 2010년 5.24 조치로 남북경협 일을 하고 있었던 남편도 일자리를 잃게 되어 많이 힘들었습니다.
기자: 남편께서도 남북경협 일을 하셨군요. 남편마저 직장을 잃어 많이 힘들었겠습니다. 그러면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는 자주 연락하십니까?
정성혜: 남북교류 관련 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급여가 많아 일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좀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저희는 말은 안 해도 항상 그 의미를 알고 있었고,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월급날은 다 같이 모여 술 한잔씩 하곤 했는데, 지금은 잘 만나지 못 합니다.
기자: 금강산에서 관광 일은 몇년 간 하셨나요?
정성혜: 금강산 현지 가이드로 일을 한 것은 2004년 1월부터 5~6개월 정도였습니다. 사정이 있어 나와 2004년 처음으로 개성공단 근로자 출퇴근 버스가 다니게 될 때 안내원 일을 잠깐하고 이후에 금강산 수학여행 및 대학생 통일 모꼬지 등의 남북교류 사업을 했던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 '지금 우리가 다음 우리를'(약칭: 지우다우)에서 2007년까지 일을 하였습니다.
기자: 금강산에서 일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금강산에서 일을 하게 됐나요?
정성혜: 사진을 전공했던 저는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금강산과 남과 북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고, 또 일을 하면서 할 수 있어 더 끌렸습니다. 관광을 전공했던 가장 친한 친구가 금강산에 가이드로 있어서 자연스럽게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 아, 그랬군요. 한창 금강산 관광이 이뤄질 때 남측에선 하루 평균 몇명이 왔습니까?
정성혜: 제가 금강산 현지에 있을 때는 숙소가 많지 않아 하루에 머물 수 있는 인원은 500~600명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많은 숙박시설들이 생겨 2007년 3월 금강산에 하루에 가장 많이 머문 인원이 2천300명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 금강산에서 북측 안내원들과도 친했을 것 같은데, 만나면 주로 무슨 대화를 나눕니까?
정성혜: 북에 도착해 입국절차를 밟을 때 통행 검사 하시는 분들이 있고, 산에서는 환경관리원들이 있습니다. 통행 검사 시 만나는 분들은 자주는 뵙지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들이 길지 않아 짧게 인사 나누고 안부를 묻는 정도였습니다. 금강산에서는 남측 현지 가이드를 그냥 조장이라고 부르는데요. 예를 들어 "조장 요즘 살이 많이 불었다. 살까기 해야겠다."는 정도의 농담도 하고 그랬습니다. 또 산에서 만나는 환경관리원들 중에서는 오빠,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남자 친구나 가족 이야기도 나눴던 관리원들도 있었습니다.
기자: 금강산을 사랑했던 만큼 일을 하면서 보람도 참 많았을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어떤 게 있을까요?
정성혜: 개인적으로는 금강산 온정리 온천을 제일 사랑하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와서 금강산 정상까지 오르고 북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눌 때와 정확하게 연세는 기억이 안 나지만, 금강산 관광 온 노인께서 여기 온정리 마을이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곳이라고 하셨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기자: 아직 젊은데, 금강산 관광 재개되면 다시 가서 일하실 의향이 있습니까?
정성혜: 네, 당연하죠. 흔히 어르신 분들 은퇴하시면 시골 내려 가서 전원 생활 하시는 거 많이 꿈꾸시잖아요. 저는 그 당시 금강산 온정리 마을에 와서 살아야겠다고 꿈꿨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는 동안 많이 힘들었지만, 조금씩이라도 하고 있었던 일들이 우리 아이들과 하는 일들이었고요. 궁극적인 목적은 남과 북의 학생들이 금강산에서 만나 함께 어울리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캠프를 여는 일들을 할 것입니다.
기자: 네, 말씀하신 것처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는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남북교류와 사람들, 지금까지 금강산 관광 안내원이었던 정성혜 씨를 만나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바쁘실 텐데 오늘 회견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성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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