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야기] 전화비만 200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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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내가 사는 이야기>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내가 사는 이야기>는 평양 무역일꾼, 김태산 씨와 자강도 시 공무원 문성휘 씨가 남한 땅에 정착해 살아가는 솔직한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원에서 나와 남한에서 살 집에 들어간 첫날밤. 문성휘 씨는 생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한 병 마셨답니다. 뭐가 잘 못 됐는지 문성휘 씨 집만 전기도 온돌도 안 들어왔다는데 그 춥고 깜깜한 밤, 혼자 마시는 술 한 잔에 눈물이 절로 나더랍니다. 날이 밝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온 뒤 결국 고장이 아니라 뭐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는데 이렇게 좌충우돌 남한 살이가 시작됐습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김태산, 문성휘 : 안녕하세요.

진행자 : 지난 시간에 하나원에서 나와 처음 남한에서 앞으로 살 집에 들어간 얘기를 했습니다. 이제 진짜 남한 생활이 시작되는데요. 이제 혼자서 알아서 살아야 하는데 말이 그렇지 처음에는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었을 것 같아요?

문성휘 : 적십자사나 복지관들에서 탈북자들에게 컴퓨터를 교육시키는 것이 있어요. 그런 데 나가서 공부도 하면서... 그리고 직업 교육을 따로 또 하거든요? 그런 것도 들으면서 동네 지리도 익히면서 점차 자리 잡아 가는 것이죠.

김태산 : 저 같은 건 집에 집사람도 있고 아이도 있고 말할 대상이 있지만 문 선생같이 혼자 들어온 분들은 토론할 사람도 없고 참 더 막막하죠. 저도 뭐 50세가 넘어서 왔으니 어디 오라는 데도 없고 막막하죠. 북쪽 같으면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싫든 좋든 잘하든 말든 어딜 가라고 시키는데 여기는 누가 시키는 것이 없는 자유 사회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노를 저어 가야하는데 어디가 동쪽인지 어디가 남쪽인지를 모르니 헤매게 되는 것이죠.

문성휘 : 저는 첫 달에 전화비가 20만원 나왔어요.

진행자 : 네? 20만원이면 거의 200 달러예요. 진짜 많이 나온 건데요?

문성휘 : 얼마나 황당하던지... 처음 전화를 지었으니까 쓰고 싶었던 거예요. 게다가 당시에는 문자를 보낼 줄 몰라서 더 전화만 썼어요. 탈북자들 끼리밖에 연계가 없으니까 서로 전화로 어떻게 일자리를 잡냐, 집은 어디냐, 어떻게 지내느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전화비가 첫 달에는 엄청 달아나더라고요. (웃음)

진행자 : 사실 처음에는 다 그렇죠? 사는 집 만해도 생각하고 좀 다르지 않으셨어요? 요즘은 다들 남한 연속극을 보고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딱 아파트를 받아서 들어가 보고 연속극에서 나오는 집과 달라서 실망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던데요?

김태산 : 그렇죠. 우리 집이 17평. 근데 진짜 17평이 아니라 여기에 주차장, 엘리베이터, 복도 좀 들어가고 해서 실제로는 15평 정도 되요. 그래도 이거라도 나한테 공짜로 차려진 것만도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평양에서 얘들을 데리고 나오다 보니 집이 좀 작은 것만은 사실인데 솔직히 북한에도 일반 노동자들도 한 집에서 두 세대, 세 세대가 사는 집들도 많거든요. 그걸 보면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저희에게 17평짜리라도 준 것이 감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성휘 : 집 크기만 보자면 북한의 일반 노동자들이 사는 쓸쓸한 집과 비슷해요. 그런데 집안에 화장실 다 있지 가스 쓰지 난방이 보장되지. 제가 한 10일 동안 밖에 안 나간 것 같아요.

진행자 : 왜 그러셨어요?

문성휘 : 한 3일은 주변을 알아보려고 빙빙 돌았는데 그 다음엔 음식을 끓여 먹는 것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시장에 가서 채소고 고기고 사서 가마에 쌀이랑 통째로 넣어서 소금, 간장, 기름 다 넣어서 부글부글 끓여서 밥도 아니고 국도 아닌 걸 그대로 먹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것도 짜증나서 라면 한 박스를 사다가 아침, 점심, 저녁 라면만 먹었는데...

김태산 : 사람이 혼자 살면 저렇게 돼. 아이가 있으면 아이를 먹이기 위해서라도 하는데 이건 누구를 어떻게 해야 할 의무가 없으니까 고저 막 사는 거야. 근데 뭐 북쪽에서처럼 없어서 못 먹으면 서러워서 눈물도 나갔지만 여기야 자기가 하기 싫어서 안 먹는 걸 어쩌겠어요!

진행자 : 여성분들은 정말 딱 나오면 살림을 하니까 가스 불 그냥 올라와서 불 안 때도 되고 물 틀면 뜨거운 물도 나온다고 굉장히 좋아하시던데요. 남자 분들은 보시는 게 좀 다를까요?

김태산 : 참,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나가서 나쁜 얘기만 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게 솔직히 사실입니다. 제가 평양에서 살면서 가스, 석유 다 써봤는데 돈을 좀 주고 뇌물을 바쳐야 그나마 떨어지지 않게 썼어요. 그런데 여기는 맘껏 쓸 수 있잖아요. 쓰기 편해야 많이 쓰기 때문에 이걸 보고 참 풍족한 사회이고 경제가 발전하니 이렇게 좋은데 북쪽은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으니 사람 살기가 힘들구나. 같은 집안에서도 이것이 뭐하는 것인가 참 생각이 많았죠.

문성휘 : 저는 처음에 돈을 아끼자고 나가서 작은 책상을 하나 샀어요. 2-3일 있다 보니 복지관 사람들이 와서 책상이랑 주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중고품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놓고 살았는데 얼마 있다가 복지관에 계신 분이 불교계 누구를 모셔왔어요. 탈북자들이 사는 집이 어떤지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모셔왔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저희 집에 뭐가 있나요. 그냥 아무것도 없지 않아요?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보고 가시더니 다음날 차로 TV랑 밥그릇 세 개를 가져다줬는데 아주 좋은 거예요. 여러 가지 생필품을 줬는데 처음에는 이 분이 나에게 왜 이러는지 왜 나한테 접근하는지 몹시 궁금했는데 남한에는 그런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저 없는 사람들 도와주고... 참 고마웠어요.

진행자 : 남한 사회에는 사기 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도 참 많은 사회입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 하셨지만 이제 일을 하셔야지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일자리 구하기가 만만치 않죠?

김태산 : 내가 할 수 있는 타당한 일자리가 사실 없어요. 북에서 배워온 재간이 없으니까 힘을 쓰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운전을 했으면 제일 좋겠는데 그것도 자리를 구해보니 회사 사장들은 다 나이가 젊고 늙은이는 데려다가 부려먹기 어려우니까 받아주기를 꺼리더라고요. 그래서 담당 형사가 소개해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돼서 인력 사무소에 명함을 보고 찾아갔어요. 거기 가서도 주민등록증을 보더니 나이 들어서 안 된다고 해서 한번 좀 시켜봐 달라. 북쪽에서 온 사람인데 하루 시켜보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한번 시켜봐 달라고 하니까 하루 가니까 건설 현장에 보내더라고요.

진행자 : 어떤 일 하셨어요?

김태산 : 벽돌 날라 올리고 바닥 정리하고. 북쪽에서 노동자들 일하는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근데 그날 못하면 일자리를 못 얻을 것 같아서 참 열심히 했어요. 열심히 하니까 건설 현장 책임자도 다음에도 또 나오라고 해서 계속 거기서 일을 했어요. 힘들면 그 다음날은 쉬고 그랬는데 여기는 안 나가면 왜 안 나왔냐고 찾아보고 그런 것은 없는데 그런 통제가 없으니까 자꾸 집에서 놀게 돼서 문제더라고요. (웃음)

진행자 : 그런 인력 시장이 있는 건 그럼 어떻게 아셨어요?

문성휘 : 그건 아마 탈북자들이 더 잘 알아요. 탈북자들 사이에서 네트워크도 있고 하나원에서 알려줘요.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고용 지원 센터, 복지관에 가도 되고 직업 박람회가 열리는 데 거기에 가도 된다고요. 그리고 벼룩시장, 가로수 이런 직업 신문도 있는데 그걸 봐야한다. 저도 벼룩시장을 보고 직업을 찾았거든요. 제가 처음 얻은 직장은 인쇄하는 회사였어요. 전화를 거니까 말이 다르잖아요.

김태산 : 단번에 알아보더라고요.

문성휘 : 억양이 다르니까 조선족이냐 물어 보기에 아니라고 북에서 왔다고 북조선 사람이라고 하니까 아주 놀라는 거예요. (웃음) 자기들은 중국 조선족은 일을 시켜봤는데 북한 사람은 일 시켜본 적이 없다. 북조선에서 어떻게 왔느냐, 여권을 떼서 왔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웃음) 남한 분들 탈북자에 대해 모르는 분들 너무 많아요.

김태산 : 지금은 탈북자들이 늘어나서 좀 바뀌었어요.

문성휘 : 그래서 설명을 했어요. 이렇게 저렇게 고생을 해서 국경을 넘어 나왔다. 그러니까 동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번 와보라고 해서 가봤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쉬웠어요. 그리고 직원도 회사 사장님하고 운전기사, 저까지 세 명이었어요. 작은 회사였는데 제주도도 납품하고 강원도도 납품하고. 거기서 제가 석달 일했는데 참 그분들이 좋았어요. 북한에 대해 호기심도 많고 인정도 많고... 남한 일이 북한 일보다 결코 쉽지 않아요. 저도 북한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참 많이 해봤는데 북한은 20분을 일하고 30분 쉬어요. 그런데 남한은 일단 기계를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하더라고요. 어쨌든 그렇게 힘들어도 먹을 것도 잘 주고 한 달 있다가 월급을 탔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웃음)

문성휘 씨의 첫 직장은 인쇄소, 김태산 씨는 건설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지금 문성휘 씨는 RFA 기자로 일하고 김태산 씨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해온 결과인 것 같은데요. 문성휘 씨는 남한에서 일하면서 일의 능률과 효율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답니다. 그리고 두 사회의 차이도 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는데요 이 얘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진행자 : 두 분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문성휘, 김태산 : 감사합니다.

저는 이현주 였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