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내가 사는 이야기>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내가 사는 이야기>는 평양 무역일꾼 출신 김태산 씨와 자강도 공무원이었던 문성휘 씨가 남한 땅에 살아가는 진솔한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욕하며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요. 남쪽에 온 탈북자들의 상황이 정말 딱 그렇습니다.
INS - 헬스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보고 욕했는데 이제 딱 내가 그렇습니다. (웃음)
처음 만난 남한 사회... 참 이상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습니다. 남한 사회가 진짜 이상해서 그럴 수도 있고 오해와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는데요.
어느 정도 살다보면 그게 왜 그런지 이해도 되고 그럴만하다고 납득하면서 어느새 똑같이 따라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데 이런 과정이 바로 정착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 <내가 사는 이야기> 욕하면서 닮아가는 그 애증의 과정을 얘기해봅니다.
문성휘 : 하나원에 있을 때 선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인사를 해요. 밥 먹었어요? 북한에서는 식사하셨습니까? 이러는데 여기 선생들은 꼭 들어와서 밥 먹었냐고 물어봐요. 거친 농사꾼들이 말하는 것 마냥 그래요.
김태산 : 맨 처음에 들으면 좀 그래요. 아랫사람한테 하대하는 듯이 들려요.
진행자 : 일부러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
문성휘 : 북한 같았으면 옆집에 놀러갔을 때 하는 말이에요.
김태산 : 지금은 이해가 되는데 그때는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그리고 남자들이 이랬어요, 저랬어요... 이러니까 진짜 이상하더라고요. 북쪽에서는 했습니까, 어땠습니까... 이런 식으로 쓰죠. 근데 이제는 할 수 없이 그걸 따라는 거예요. 지금도 거예요... 막 이러죠. (웃음)
진행자 : 맞아요. 북쪽에서 오신 남성분들은 이 말투가 그렇게 어색하신가 봐요?
김태산 : 저도 서울 말씨 처음 듣고는 남자가 왜 이렇게 요사스럽냐고 했어요. 거북하고 싫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이게 익숙해졌어요. (웃음) 저번에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남쪽 대표단이 북쪽에 가서 찍은 화면이 나오는데 여성 안내원 말투가 왜 그렇게 촌스럽고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웃음) 참 이렇게 사람이 변하누나 싶습니다.
문성휘 : 또 짜증나는 게 아침에 한번 만나서 인사를 하면 됐지 점심에 만나도 하고 저녁에 만나도 하고 인사를 계속해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이건 놀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근데 점차 살면서 저도 그렇습니다. (웃음)
진행자 : 하나원에서는 아무래도 남쪽에 처음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일부러 더 친절하게 하는 건 아니겠어요?
문성휘 : 아니요. 하나원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인사를 많이 그리고 자주 합니다. 보면 볼 때마다 안녕하세요, 가면 가는 곳마다 안녕하세요 그럽니다. 그리고 물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마트에 가도 사장님, 장마당에 가도 사장님... 나 사장님 아닌데 그냥 회사원인데 다 나보러 사장님이래요. 기왕 불러주겠으면 회장님이라고는 왜 안 하나... (웃음)
김태산 : 저번에 얘기했지만 여기 와서 호칭 문제가 따분해요. 북쪽에선 '동무'라면 다 해결됐는데 여기서는 동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야'라고 할 수도 없고 인천공항에 내려서부터 이 호칭문제로 골머리 앓았는데 그래서 가만 생각해 봤더니 사장님이 제일 편해요. 길 물어볼 때도 그렇고 뭘 물어볼 때도 그렇고요. 그게 그냥 만능 통행증입니다.
문성휘 : 이자 생각해보니 그 말이 북한에서 동지, 동무하는 말과 비슷한 거네요.
진행자 : 근데 그게 그렇게 듣기 거슬렸어요?
문성휘 : 사장님보다 더 듣기 거슬리는 것이 '저기요''여기요' 하는 소리요. 아닌 게 아니라 길거리 나서서 누굴 좀 불러서 뭘 좀 물어보려면 저기요 소리가 먼저 나가요. (웃음) 딱히 부를 수 있는 명칭이 없잖아요? 남한도 동무, 동지라는 말 쓰면 안 될까요?
진행자 : 남한에서 동무라는 말 썼죠. 친한 친구한테 동무... 그런데 사실 요즘엔 잘 안 쓰죠. 북쪽에서 많이 써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저 개인적으로도 동무, 동지가 좀 어색하거든요.
문성휘 : 아, 이건 비판해야할 부분인 것 같아요. 좋은 말은 남북이 같이 쓰면 안 되나요?
진행자 : 이제 함께 쓰는 말들도 있죠. 그런데 북쪽에서도 남쪽에서 써서 일부러 안 쓰는 말 있지 않나요?
김태산 : 우리 때도 '차원'이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했죠. 우린 이것과 차원이 달라... 이런 말 많이 썼는데 남쪽에서 쓰는 말이라고 쓰지 말라고 했고 그 다음엔 남한을 '아랫동네'라고 부르는 것도 못 하게 했습니다. 적을 왜 친근한 동료처럼 아랫동네라고 하냐면서 못 쓰게 했죠. 아랫동네라고 말하기가 편하거든요. 아랫동네 아이들 왔대... 이러면 좋은데요. 북쪽에서도 남쪽이 쓰는 말을 못 쓰게 했죠. 참, 정치가의 야심이라는 것이 남북이 똑같고 웃기는 거예요.
문성휘 : 맞습니다. 북쪽에서도 해방 후엔 '씨' 자를 동무로 고치면서 못 쓰게 했죠.
김태산 : 나는 아직도 여기 와서 김태산 씨 하게 되면 누구네 집 머슴같이... 정말 딱 그렇게 느껴져요. 아직도 말이 귀에서 좀 멀어요.
진행자 : 무슨 무슨 씨는 하대가 아닌대요.
김태산 : 그렇죠. 남녀 간에도 사랑하는 사람 이름에 씨를 붙이며 좋아 그러더라고요? 그런걸 보면 이게 나쁜 말이 분명 아닌데 아직도 귀에 거슬립니다.
진행자 : 저는 그래서 북쪽에서 오신 분들은 일단 선생님 그러는데요. (웃음) 그래도 그렇게까지 기분 나빠 하실 줄은 몰랐네요. 사실 방송에서는 청취자들이 나이든 사람부터 어린 사람들까지 다양하니까 방송에 나오면 일단 누구누구 씨로 부릅니다.
김태산 : 맞아요. 우리는 이제 알긴 하죠.
문성휘 : 그리고 여기 왔을 때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를 굉장히 잘 못 생각했어요. 제가 어느 교회에서 일할 때 목사님이 부산에 가는데 비행기를 타고 간데요... 아니, 이 사람이 얼마나 돈이 많아 비행기를 타나? 저는 그때 부산까지 비행기를 타자면 돈이 굉장히 비싼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비행기 표 값이 급행 기차 값보다 조금 더 비싸더라고요.
김태산 : 맞아요. 나도 제주도 가는 비행기 표가 엄청나게 비싼 줄 알았어요.
문성휘 : 우리가 비행기를 처음이자 끝으로 타보는 것이 거의 제3국에서 한국 들어 올 때죠. 그리고는 비행기 값을 알아 볼 일이 거의나 없죠. 그래서 저는 누가 비행기 타고 어디 놀러 간다고 하면 저 사람들은 얼마나 돈이 많아서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나 그랬거든요.
김태산 : 나는 제주도 비행표 값을 몰라서 가족 단위로 놀러갈라면 너무 비싸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충분히 여행갈만 하겠더라고요. 전혀 비싸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정말 이해 못 하다가 이제 나도 따라하는 것이 남쪽에는 연휴가 있잖아요? 주말과 공휴일을 끼어서 며칠씩 쉬는 거요. 남쪽 사람들은 연휴가 되면 가족들이랑 집을 버리고 어디로 뛰는 거예요. 일 년에 한 번도 아니고 여름에도 가고 겨울에도 가고 얘들 방학에는 꼭 가고... 맨 처음에 와서는 저 사람들은 진짜 할 일도 없다. 뭣 때문에 집에서 가만 쉬지 않고 돈 쓰면서 온 가족이 몰려다니며 그러지 그랬는데 이제 저도 한 10년 살다보니 연휴만 되면 가족들에게 어디 갈까 물어봅니다. (웃음) 맨 처음에 와서는 그렇게 좋지 않게 보이던 것을 이제는 내가 하고 있는 건데요. 이게 문화적, 시대의 흐름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문성휘 : 근데 김 선생님, 우리 두 사람은 탈북자들 중에서 굉장히 뜬 사람들(느린 사람들) 같습니다. (웃음) 저 가족들하고 이번에 처음 여행을 갔었는데 멀리도 안 갔어요. 가평의 두물머리라고... 가족과 같이 여행가면 밥도 사먹어야 하고 얼마나 돈이 많이 들까했는데 우연히 집사람하고 어디를 다녀오다가 호수공원이라고 하기에 한번 들어가 보게 됐어요. 너무 좋았고 아이들도 함께 와봤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가족끼리 함께 여행을 갔는데 진짜 나가니 좋긴 좋더라고요. (웃음)
김태산 : 여긴 겨울엔 스키장에 많이 가잖아요? 처음엔 그걸 보면 추운데 집구석에나 있지 돈 쓰면서 어딜가! 북한 늙은이들 말투죠? 내가 이랬는데 (웃음) 몇 년 전인가 얘들이 하도 졸라서 스키장에 다녀왔어요. 가서는 민박을 할까 했더니 집사람이 리조트를 벌써 예약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아니꼽지만 어쩔 수 없이 저기서 묵으며 이틀을 밤낮으로 스키타고 하면서 놀고 보니까 이게 이렇게 즐거운 거구나 싶더라고요.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진행자 : 그러고 보면 이렇게 어디 가족들과 연휴에 놀러가고 하는 것, 돈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문성휘 : 그건 그래요. 그리고 또 마음의 여유도 없거니와 좀 게으르기도 해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웃음)
남쪽에 와서 이해 안 되는 것이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남한 사람들이 운동 삼아 산에 오르는 것도 체중 줄인다고 살까기하는 것도 영어를 많이 쓰는 것도 이해 안 되는 일투성인데요. 이게 바로 남북한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이 오해와 선입견을 버리고 살면서 동화되듯 이 문제는 그렇게 풀어 가면 되는 것이겠죠.
이 얘기, 다음에도 이어갑니다. <내가 사는 이야기> 오늘 욕하며 닮아가는 남한 생활 얘기 해봤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인사드릴게요.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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