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야기] 유행(1) 허리춤 열쇠 꾸러미 유행,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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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내가 사는 이야기>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내가 사는 이야기>는 평양 무역일꾼 출신 탈북자 김태산 씨와 자강도 공무원 문성휘 씨가 남한에 정착해 살아가는 진솔한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남쪽은 가을이 완연한데요. 계절이 바뀌는 시기... 남쪽 신문에서 올 가을, 겨울 유행이 뭔지 자세히 소개하는 기사가 자주 보이네요. 올 여성복의 유행 색상은 버건디, 그러니까 짙은 자주색이고 아주 화려한 문양의 상의와 자기 본래 치수보다 2배 이상 큰 겉옷이 유행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제까지 그렇게 촌스러워 보였던 옷이 유행이라면 어느 순간 예쁘게 보이고 갖고 싶고 입고 싶었던 경험, 있으십니까?

북쪽 사회도 힘들다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있고 또 그 사이에 돌고 도는 유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북쪽에선 요즘 뭐가 유행인가요?

<내가 사는 이야기>, 오늘은 남쪽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수 만 가지 유행에 대한 얘깁니다.

진행자 : 북쪽에서도 유행이 있죠?

문성휘 : 그럼요. 북한에서도 굉장히 유행이 빠르고 또 예민해요. 사춘기에 있는 중학교 학생들과 대학생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은 진짜 유행에 민감합니다. 또 북한에서도 세대별로 유행이 굉장히 다른데요. 결혼하기 전엔 옷차림에 굉장히 신경 쓰고 사회에 갓 나온 젊은 친구들은 한국 영화를 누가 더 많이 봤나, 외국에 대한 정보를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나, 결혼한 사람들은 집이나 가전제품, 예를 들면 밥 가마 같은 데서 유행을 많이 따지죠.

김태산 : 북한에도 유행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데 문 선생과 제가 남쪽에 들어온 시간이 차이가 나잖아요? 저는 2천년에 북한을 떴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의 유행이 북한에 들어오려면 10년이 넘어 걸렸어요. 고난의 행군 이후엔 그런 유행이 좀 더 빨리 들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보면 남쪽에서 들어간 드라마나 영화가 참 이런 유행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물론 거의 3개월에 한 번씩 유행이 바뀌는 남쪽의 빠른 속도를 따라갈 순 없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많이 빨라졌어요.

진행자 : 참... 저나 여기 두 분이나 유행에 그렇게 민간한 사람들은 아닌데요. (웃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볼까요? 요즘은 뭐가 유행이에요?

김태산 : 저는 항상 낚시 때문에 강가에 나가 있으니까요. 거기 가서 보면 요즘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자전거 탈 때 입는 옷, 안경, 신발, 장갑, 가방 같은 게 다 유행이 있어요. 그리고 그 유행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몰라요. 요즘은 자전거도 아무거나 입고는 못 타겠어요...

진행자 : 김 선생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군요? (웃음)

문성휘 : 에이... 선생님! 그건 자전거를 전문 타는 동호회의 성원들이나 그렇지요. 내 자전거는 이제 사놓고 열 번이 탔는지 녹이 슬어 가는데요. (웃음)

김태산 : 그러니까 문 선생처럼 공식 기관에 매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은 유행에 따르기 힘든 거예요. (웃음)

진행자 : 왜 처음엔 등산이 막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그냥 운동화에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산에 갔다가 너무 창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들 등산복을 잘 차려입고 있으니 그냥 평상복 차림이 이상하더라고요.

김태산 : 맞아요. 북한식으로 표현하면 딱 농촌에서 온 사람 같죠? (웃음)

문성휘 : 아! 그리고 중요한 유행이 또 있네요. 삼성에서 새로운 스마트 폰, 휴대 전화가 나오지 않았어요? 이런 게 나오면 또 유행이죠. 진짜 질이 좋고 잘 만들었던데 제가 전화기를 한 달에 한 번 바꿀 수는 없고요. (웃음) 근데 한국을 보면 유행이라고 하면 한 집단 안에서 세분화 되서 유행을 해요. 북한에서는 뭐가 유행이다 싶으면 그냥 확 번지거든요.

김태산 : 남녀노소에 나눠서 다 유행이 다르죠. 저는 그야말로 이제는 '노'에 속해서 별로 바라는 것도 없지만 우리 집에 딸이 둘이거든요. 우리 큰딸아이가 대학생인데 이 아이는 신발 하나 바꿔 신는데 3개월입니다. 아무리 혼을 내도 소용이 없어요.

문성휘 : 유행 못 따라가요... 저는 삼성 카메라 새로 나왔을 때 집사람한테 일주일 동안 애걸복걸하면서 샀는데 한 열흘 동안은 산에도 가고 마을도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찍었어요. 근데 찍고 나서 보니까 컴퓨터에 찍어놓은 사진을 저장할 공간도 마땅치 않고요. 이제 장 안에 넣어놓았는데 가끔씩 눈에 띄면 아니, 내가 왜 이걸 샀니?? (웃음)

진행자 : 유행이여서요. (웃음)

문성휘 : 바로 그거죠!

김태산 : 저는 세계적으로 유행을 선도하고 제일 빠른 도시가 프랑스 파리라고 들었어요. 한 귀족 부인이 장갑 한쪽을 찾다가 못 찾아 한 쪽만 끼고 나갔는데 그게 유행이 돼서 다른 부인들도 다 장갑을 한쪽만 끼고 다녔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근데 요즘 보면 한국의 젊은 아가씨들은 유행에 대해서는 프랑스 뺨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남쪽에서 만든 상품들이 아주 좋지 않습니까?

문성휘 : 이번에 보니까 삼성이 도시바, 소니 같은 유명한 전자 상표들을 모두 젖혔는데요. 매출 차이가 많이 나더라고요. 한 때 파나소닉, 도시바, 소니 같은 기업들이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했어요.

김태산 : 근데 전자제품 뿐 아니라 먹는 것에도 유행이 있잖아요? 저는 술을 즐기니까 그런데 눈길이 가는데 지난해까지는 탁주, 막걸리가 아주 유행이었잖아요? 남쪽 안에서만 유행이 아니라 수출도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올해는 또 그 소리가 쑥 들어갔네요.

진행자 : 두 분 다 집에 유행의 선두두자들이 계시죠? 두 분 다 딸들이 가장 유행에 민감한 20대 초반인데요. 지켜보시면 좀 어떠세요?

문성휘 : 나는 암만 봐도 뭐가 유행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애들은 뭐든지 처음 나오는 걸 좋아해요.

김태산 : 우리는 보지도 못한 걸 쓰고 들고 입고 신고... 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한 달 내지는 두 달에 한 번씩은 뭐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걸 다 들어 주려면 나는 저 속에서 막 뭐가 올라오죠. (웃음) 우리 북쪽 사람들 같으면 겨울 신발 하나, 여름 신발 하나면 행복한 줄 아는데 딸들은 계절별로 바꿔 신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날짜별로 바꿔 신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유행이라는 게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같이 돈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가장들에게는 고달픈 문제입니다.

문성휘 : 예를 들여 갤럭시 s3 같은 새로운 기계가 출시된다. 미국 어느 전시회에서 선 보였다 이런 소식이 나오면 그게 나올 날만을 기다려요. 그리고 얘들은 새로 나와서 인기 있는 음악에 굉장히 신경을 써요. 나는 들어도 하나도 좋은지 모르겠더만....

진행자 : 정말 어떤 유행들은 우리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죠. 근데 재밌는 건 그런 유행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눈과 귀에 익으면 또 괜찮단 말이죠...

김태산 : 사실 유행이 나쁜 게 아니지요.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작용을 하고 유행을 따라가면서 생산도 자극되고 유통도 발달합니다. 몽땅 낡은 것만 추구하면 경제가 어떻게 되겠어요? 근데 유행을 너무 지나치게 따라가니까 절약하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안타까운 거죠. 가만 보면 유행을 따라가려는 젊은 세대와 그 속도를 조절해줬으면 하는 우리 늙은이들의 싸움 같아요.

진행자 : 근데 두 분은 젊은 시절엔 어떠셨어요? 두 분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문성휘 : 우리 때는 열쇠를 잔뜩 갖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어요. 바지 허리띠에 고리를 매서 열쇠를 잔뜩 매달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어요. 북한은 도적들이 있으니까 집에 자물쇠를 꼭 달아서 잠그고 다녀요. 집에도 자물쇠를 잠그고 창고도 자물쇠를 잠그고 직장에서 자물쇠를 잠그고... 그래서 열쇠가 많으면 뭔가 권력도 있고 부유해 보이는 거죠. 그게 유행이 돼서 쓰는 열쇠든 안 쓰는 열쇠든 몽땅 주워 모으는 게 전쟁이었다니까요. (웃음)

열쇠 꾸러미 유행, 청취자 분들 중에서도 분명 따라해 보신 분들이 계시죠?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웃음도 나올만한 얘긴데요...

제가 중학교 때는 남쪽에서 기장이 길고 통이 아주 넓은 바지가 유행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질질 끌리는 통 바지를 입고 온 동네 바닥을 다 청소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행은 그냥 단순한 또래들의 유희거리로만 웃어넘길 순 없습니다. 유행 자체가 산업을 주도하고 또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기도 하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 얘기 이어갑니다.

<내가 사는 이야기>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 인사드릴게요.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