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TV의 역사 (1)

조선중앙TV는 지난달 보통강전자제품공장에서 시야각이 넓고 전력소비가 적은 신형 에너지절약형 곡면액정텔레비전(커브드 TV)이 생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TV는 지난달 보통강전자제품공장에서 시야각이 넓고 전력소비가 적은 신형 에너지절약형 곡면액정텔레비전(커브드 TV)이 생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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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김태산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김태산: 네, 문 기자님 오래간만입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전 시간에 저희들이 북한의 방송역사, 그리고 북한의 선전선동수단들이 붕괴되던 그 역사에 대하여 돌이켜 보았는데 지금까지 북한에 남아 있는 선전선동수단, 사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노동신문’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노동신문’도 이젠 부수가 확 줄었고 보는 사람들이 얼마 없지 않습니까? 대신에 지금은 컴퓨터가 발전해 가지고 인터넷으로 ‘노동신문’이랑 이런 걸 본다고 하는데 사실 잦은 검열 때문에 개인집에서 인터넷을 거의 사용 안하고 있습니다. 그저 유일하게 북한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접할 수 있는 선전선동수단, 언론수단은 텔레비죤(TV)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김태산: 네, 그렇죠.

기자: 그런데 그나마 북한은 텔레비죤도 평양만 방송되는 텔레비죤이 있고 지방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방송은 ‘조선중앙텔레비죤’ 딱 한 개 채널이 아닙니까?

김태산: 그런데 그 한 개 채널도 24시간 계속 방영하지는 않죠?

기자: 네, 예전엔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김태산: 좀 앞당겼네요?

기자: 네, 그리고 주말에는 여전히 9시부터 11시까지 방송을 합니다.

김태산: 오전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라는 거죠?

기자: 네, 주말이라고 하면 한국은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로 생각하고 이틀간 휴식을 하는데 북한은 주말이라고 하면 일요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김태산: 네, 철저히 일요일만 주말이라고 하죠.

기자: 네, 그런데 이러한 텔레비죤 마저도 전기가 안와서 주민들이 거의나 못 보고 있다고 합니다.

김태산: 아, 여전히 그렇군요.

기자: 네, 얼마전에 쏴 올렸다는 그 ‘화성 15’ 말이죠.

김태산: 아, 그 미사일 말이죠?

기자: 네, 김정은이 ‘화성 15’ 미사일 발사를 직접 시찰했다고 하는데 북한 사람들 아직 그 장면을 못 본 사람들 엄청 많다고 합니다. 거의 대다수라고 하면 되겠죠.

김태산: 아니 그럼 전기가 안 들어와서 텔레비죤을 못 보다나니 그렇게 됐군요?

기자: 네, 뭐 지어는 ‘화성 15’를 발사한지 한 주일 지나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골 같은데서 누가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모르고 있었다. 이런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김태산: 지구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오히려 미사일을 발사한 나라 인민들은 모르고 있다는 건데 참 웃기는 일이군요.

기자: 네, 그만큼 전기사정이 어렵다는 거죠. 전기사정 때문에 사실 텔레비죤도 북한의 선전선동수단으로서 그렇게 큰 위력을 발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래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선전선동 수단이라는 게 텔레비죤이니까 그래서 저는 항상 궁금했거든요. 제가 태어나서 철이 들고 보니까 벌써 텔레비죤이 있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등에 업혀 텔레비죤 구경을 가던 생각이 나거든요.

김태산: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게 몇 년도 쯤 입니까?

기자: 그게 한 75년 그때인가? 그때에 ‘교육자 대회’, 무슨 대회 참가자들과 (조총련) 귀국자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냐하면 ‘대남 가족’들, 말하자면 남한에 간첩으로 파견된 사람들의 가족들에겐 텔레비죤을 주었죠.

김태산: 말하자면 “(노동당 조직지도부 간부) 11과” 대상들이죠.

기자: 그때 텔레비죤이라는 게 제 관식이었죠. 전자관식이어서 전기를 넣으면 한 2분 동안 ‘쏴∼’ 하는 소리가 나다가 화면이 나왔죠.

김태산: 전자관을 달구어야 그다음엔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죠. 저도 이제 텔레비죤을 1972년도 이후에 제가 군수공장에서 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1972년도 이후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 무슨 대회들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공장 지배인, 당비서 이 두 사람은 큰 공장 간부들이니까 매번 큰 대회들에 자주 참가하곤 했는데 그때 올라가서 텔레비죤을 선물로 받아 왔어요. 선물로 받아와서 우리공장 노동자들이 수천명이 됐는데 그때 텔레비죤은 지배인과 당 비서네 집밖엔 없었어요. 그때 명절 때면 우리 합숙생들을 놀려오라고 해서 당 비서네 집에 가서 텔레비죤이라는 걸 보던 생각이 납니다.

기자: 네, 제가 어렸을 땐 텔레비죤이라는 게 마을에 얼마 없었으니까 그때엔 영화관들이 굉장히 붐볐죠. 한 번씩 영화를 한다고 하게 되면 그 영화표를 떼는 게 정말 전쟁이었죠. 그리고 텔레비죤도 새로 나온 영화를 한다든가 아니면 주말엔 외국영화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면 아닌 게 아니라 텔레비죤이 있던 집들은 문도 닫지 못하던 생각이 납니다. 지어는 부뚜막에 가마위에까지 올라 앉아 텔레비죤을 보는 사람들까지 있었거든요. 저는 저의 앞집에 대회에 참가했다가 텔레비죤을 선물로 받은 분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이 교육자였어요. 그래서 소련의 “템프”라는 텔레비죤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텔레비죤을 보기 위해 주말에 사람들이 꽉 찼는데 마음씨가 굉장히 착했어요. 그런데 그 집의 자식들은 오히려 사람들이 꽉 차는 게 싫어서 다른 집으로 놀려 갑니다. 거의 매일 저녁이죠. 그 텔레비죤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니까 집주인들은 먼저 잡니다. 옷을 입은 채로 어느 구석에서 자면 텔레비죤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마지막에 그 텔레비죤을 꺼줍니다. 그런 생각이 나는데 저의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게 “저 텔레비죤이라는 걸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하고 물어보니까 아마 60년대 초, 그러니까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앞으로 텔레비죤이라는 게 나온다, 앞으로 텔레비죤이 나오면 여기 앉은 자리에서 미국에서 축구를 하는 것도 볼 수 있고 영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도 여기 앉은 자리에서 다 볼 수 있다, 그렇게 상식적으로 알려주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선생님은 처음 텔레비죤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게 어느 때였어요?

김태산: 네, 맞습니다. 저도 이제 1960년대 중반, 학교 다닐 때 그때 선생님들이 “이제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그런 전기기계가 나온다. 그런 전기기계가 나오는데 그걸 텔레비죤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건 무슨 꿈같은 소릴 하냐?” 저는 필림을 돌려서 보는 영화를 어떻게 집에 앉아서 볼 수 있냐? 라디오 듣는 것처럼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해서 꿈같이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이제 1970년대 그때 조선노동당 5차대회가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이제 “전국의 텔레비죤화”를 실현할 데 대한 김일성의 교시가 있었어요. 그때 김일성이 “우리도 텔레비죤화를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아, 텔레비죤이라는 걸 우리도 만들긴 만드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땐 만들지 못하고 소련에서 ‘템프’, ‘포톤’을 비롯해서 그때 큰 나무함으로 해가지고서 얼마나 무거웠어요? 우리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당 비서, 지배인의 집에 가서 보게 되면 큰 나무상자만한, 지함으로 말하면 ‘5호 지함’ 같은 크기가 그만한데 무게가 한 30~40kg 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때로부터 이제 1975년도 어느 큰 회의에서 참가했던 우리 지배인과 당 비서가 천연색 텔레비죤이라는 걸 선물로 받아왔어요.

기자: 네,. 북한에 아직까지 선전선동수단으로 남아있는 텔레비죤의 역사, 그 시작에 대해 오늘 참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지금까지 김태산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태산: 네, 저도 오늘 참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