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김태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태산: 네, 안녕하십니까? 참 덥네요.
기자: 네, 요즘은 한국의 날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를 잘 실감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태산: 네, 참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또 다르네요.
기자: 네, 이런 날씨 속에서 건강엔 이상이 없으셨는지요?
김태산: 네, 전 뭐 아직 더우나 추우나 그런 건 걱정이 없는데 습도가 너무 높으니까 좀 불편한 점은 많아요, 그런데 북쪽에서 우리 오래 살다가 오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쪽에서 한 50년을 살았는데 우리 있을 때까지 북쪽의 날씨는 괜찮았어요. 그렇게 습도가 높고 그렇진 않았거든요.
기자: 네, 제가 최근에 온 탈북자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한도 최근 날씨가 고온, 그리고 가뭄 때문에 정말 애를 먹는데 옛날 우리가 있을 땐 밖에 빨래를 널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젠 북한 국경연선뿐만 아니라 내륙지방도 밖에 빨래를 널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김태산: 그건 무슨 뜻입니까?
기자: 이게 여름철엔 중국 쪽에서 오는 먼지, 황사, 이 영향으로 밖에 빨래를 널면 먼지가 얼마나 많이 끼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김태산: 옛날엔 그저 흙먼지, 흙먼지 했는데…
기자: 네, 사람들 얘기하는 게 북한에 내리는 비가 빗물 그대로 흙물이라는 거예요. 봄철 같은 때엔 한창 사람들이 밭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올해 같은 땐 더 가뭄인데다 산이 다 벌거벗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한 먼지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김태산: 네에, 대한민국은 공업이 발전하다 나니까 자동차 배기가스도 많이 나오고 공업가스들이 나와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북한은 반대로 산을 너무 벗겨 먹다나니까 벌거숭이산에서 날리는 먼지가 뒤집어 씌어져서, 어쨌든 다 인간들이 잘못한 후과네요.
기자: 네, 전 시간들을 통해 우리가 북한에서 문맹퇴치 운동, 그리고 어렸을 때 우리가 즐기던 유희, 어떤 것들이었는지 돌이켜 보았는데요. 전후복구건설, 전쟁의 피해 과연 어떠했을까? 저는 전쟁으로부터 이삼십년 지나서 태어났는데 그때에도 저의 마을엔 산골동네였는데 전쟁의 흔적이 있었어요. 그 전쟁의 흔적이라는 게 큰 물웅덩이들이었습니다. 후에 사람들한테 들어보니깐 그게 6.25 전쟁 때 폭탄이 떨어진 자리다, 그러더라고요.
김태산: 네, 옳습니다. 미국 비행기들이 폭탄을 떨군 자리가 1980년대, 그때까지도 메우지 못하고 늪으로 변해버린 거예요. 그런 폭탄구덩이들이 더러 있었어요. 60~70년대에는 황해도 벌판에 폭탄구덩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걸 메우는 게 큰 전쟁이었다고 하는데 거의 다 메꾸었어요. 그런데 아직 늪으로 형성된 걸 보면 너무 깊어서 메꿀 생각도 못하고 기자선생의 말처럼 거기서 아이들이 목욕을 하다가 빠져서 죽는 일도 있고 또 거기서 큰 고기들이 자라서 거기서 낚시도 하고 가뭄엔 거기서 물을 퍼가지고 양수도 하고 뭐, 50년대 전쟁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기자: 네, 저는 지금도 제가 어렸을 때 고향의 그 폭탄구덩이가 남아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논밭이나 이렇게 개관이 된 곳은 그걸 다 메워버렸는데 험한 산지라든가 아니면 토양이 나쁜 곳, 쓸모없는 땅은 누구도 손댈 염을 안했으니까요.
김태산: 옳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전쟁흔적을 보면 베트남 같은 나라엔 지뢰가 많이 묻혀있었으니깐 아직도 지뢰피해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한반도 전쟁 같은 경우엔 뭐 경계선이 이루어져 가지고 싸운 흔적이 3.8선 내놓고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지뢰피해 같은 건 그렇게 없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 포탄구덩이 흔적밖에 없지요. 거의나 이젠 다 (전쟁의 흔적들이) 가셨다고 볼 수 있겠죠.
기자: 네, 저는 그래서 "야 이렇게 폭탄 구덩이들이 아직까지 있는 정도면 진짜 전쟁은 얼마나 참혹했을까?" 저는 과거 6.25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동네사람들도 흔히 모이면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는데 "전쟁이라는 게 굉장히 참혹했다.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반면에 "난 아직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행기 한 대도 못 구경을 했어"
김태산: 아, 얼마나 산골이었으면…
기자: 네, 그런 사람들 의외로 많더라고요. 그래서 아니 전쟁이라는 게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나? 수많은 학살도 벌어졌고, 싸움도 벌어졌었고 그렇게 했을 텐데 "아, 우리 마을에선 전쟁이 없었어. 우린 전쟁이라는 게 뭔지 몰랐어" 하는 겁니다.
김태산: 옳습니다. 우리때도 보게 되면 전쟁이 끝나고 한 달 만에 자기 아버지가 산골에 들어가 있으니까 찾아가서 "아버지 나오세요"라고 하니까 "야, 전쟁도 안 끝났는데 나가서 뭐하냐?"하니 "아버지 전쟁 끝난어" 하니깐 "야 전쟁 벌써 끝났어?" 그런 웃기는 일화들이 더러 있었는데 북쪽이 산이 깊었으니깐 그쪽에 들어가서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지나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자: 네, 저의 어머니가 말씀하시는데 자기넨 딱 한번 비행기를 봤다고, 그게 6.25 전쟁이 끝나기 3일전이래요. "3일전에 미국 비행기가 들어와서 폭격을 한 게 처음이다", "그러면 마을이 많이 피해를 입었나?"하니 "아니 그때 우연히 파편에 맞은 아주머니가 하나 있었는데 그 외엔 죽은 사람들이 없다" 그때 비행기들이 와서 다리를 모조리 폭격했다고 하더라고요. "집은 폭격을 안했다" 하는 거예요.
김태산: 옳습니다. 전 52년생이니까 전쟁 시기에 태어났으니까 그때일은 모르는데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랑 우리 형제들이 전쟁을 겪었는데 제가 있던 자강도 룡림군 산골에는 미군도 들어오지 않고 인민군대만 후퇴를 위해 들어왔는데 미군은 안 들어왔으니까, 국군도 안 들어왔고 오히려 인민군대한테 이제 우리 아버지가 죽을 뻔 하고 피해를 많이 봤다고 해요. 인민군대가 낙동강까지 나왔다가 다시 밀려서 들어(후퇴)가면서 이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고 배고프고 하니 집에 들어오면 밥해내라 그러고, 밥을 안 해주면 무조건 마당에 내다 (총으로) 쏘았대요.
기자: 네, 한국에 와서 보니까 또 북한하고 다른 소리들이 나와요. 여기에 와서 기존에 6.25를 경험하신 분들이 책을 쓴 것도 그래, 그분들과 직접 대화를 해보면 한국은 북한처럼 그렇게 한가하고 "아직 미군도 인민군도 못 봤다" 그런 지역이 없다는 거예요. 아마 낙동강 전투를 그 다음에 또 중공군이 밀려오며 또 인천상륙작전이 있지 았았습니까.
김태산: 하긴 전쟁은 거의 남한 땅에서만 이루어 졌죠.
기자: 네 맞죠. 그러니까 아마 북한도 평양이남 주민들은 전쟁이라는 걸 정말 많이 실감했을 것입니다. 6.25 전쟁 역사들, 우리가 보면 아직 한국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습니다. '10.4 후퇴'를 하면서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해 들어갈 때에 모조리 산을 다 뒤졌습니다. 이 부대가 북한이 임시로 조직한 인민군 2군단이었어요. 실제 2군단이 전멸하게 되니까 후방에다 새로 조직을 한 겁니다. 이 사람들이 나가면서 개척 로를 연거죠. 후퇴를 해 들어와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숙식을 할 수 있는 개척 로를 여는 역할을 했는데 이 사람들에 의해 상당히 많이 죽었다는 거죠.
김태산: 그러니까 낙동강으로부터 (후퇴해) 들어오는 부대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었겠군요?
기자: 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먼저 나가면서 학교면 학교, 이런데다 숙소를 정하고 마을에서 쌀을 마구 거두고 소도 막 빼앗아 오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 과정에 주민들과의 충돌이 굉장히 있었는데 그저 선 자리에서 마구 쏘았대요. "나는 인민군대 후방가족인데 내 남편이 전쟁에 나가 싸우는데 이 소를 가져가면 어떻게 하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쏴 버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다나니까 이게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는데 북한이 1960년대 후 70년대 초죠. 2군단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겁니다.
김태산: 그게 다 (인민군에 의한) 처단자 가족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기자: 네, 이게 다 처단자 가족으로 되다나니까 쓰려고 해도 쓸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김태산: 원쑤를 많이 만들었네요.
기자: 네, 그래서 김일성이 이때에 내놓은 조치가 2군단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잘 못 피해자"로 해주라, 그래서 이때 "해명사업"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 이게 2군단에 의해 살해됐다" 아는 사람들 2명만 있으면, 증인만 있으면 그 가정은 애국열사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김태산: 포섭정책이네요.
기자: 네, 포섭정책입니다. 전쟁과 희생자들, 그 아픈 역사를 한번 돌이켜 보았는데요.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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