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유선방송의 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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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선생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김태산: 네, 안녕하십니까?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오늘도 어제 시간에 이어 북한의 방송역사, 특히 유선방송의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 나누려 합니다.

김태산: 네.

기자: 우리 집 앞에 있는 공영방송, 1988년, 89년 이때입니다. (야외) 유선방송 이거 꽝꽝 울리던 거 그때부터 전기사정으로 방송을 제대로 못하고 거기다가 방송이 알루미늄으로 된 거 꽤나 무거웠어요. 그러니까 그걸 다 떼어가는 거예요.

김태산: 아, 그 방송 나팔통? 그게 한 10kg 이상 나가죠?

기자: 네, 그러니까 알루미늄 10kg을 바치면 알루미늄 가마 이런 것을 바꿔주지 않았습니까?

김태산: 아하, 늄 가마 이런 걸로 바꿔주었죠.

기자: 그러니까 방송을 다 떼어가는 거예요.

김태산: 가져다가 부셔가지고는 수매를 하든가 팔든가 하는 거네요.

기자: 네, 그러면서 체신소(우체국)에서 나와 남아 있는 야외방송들을 다 철수하더라고요. 저의 집하곤 가까이에 있던 유선방송은 꽤나 오래 있었는데 체신소에서 먼저 나와 다 철수하고 그때부터 방송이 점차 선전수단으로서 기능을 완전히 잃어 간 거죠.

김태산: 아, 그 경제적 하락이 선전선동수단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네요. 평양에 살면서 그런 건 몰랐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기자: 80년대 초, 중반이 방송음질이 정말 깨끗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에 방송 음질이 되게 나빴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윙윙윙 잡음이 들려서.

김태산: 원인이 뭔데요?

기자: 그래서 물어보니까 방송중계설비에 큰 대형 전자관이 들어간대요. 사람 키만 한 전자관이 들어가는데 이 전자관이 전기를 엄청 잡아먹는대요. 그런데다가 "이 전자관이 다 70년대 소련에서 수입해 들여 온 건데 이젠 소련은 이걸 안 쓴다. 그래서 지금 이걸 교체를 못한다. 교체를 못해서 유선방송이 음질이 되게 나쁘다" 그러는 거예요. 그때부턴 인민반에서 방송을 다 끄는 거예요 사람들이…

김태산: 아, 그러니깐 경제적 하락이 정치적 하락을 동반시켜서 끌고 갔네요.

기자: 네, 북한은 정치교양 수단으로서 방송은 있어야 된다. 전쟁에 대비해서 방송은 있어야 한다 하는데 뭐 방송을 애초 듣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때도 방송 검열을 하고 "왜 방송을 껐냐?"하면 "우리 방송을 듣겠는데 좀 방송이 깨끗하게 나오게 해달라. 당신 들어와 한번 들어보라 들리는가를"… 말을 도무지 못 알아들어요. 윙윙 잡음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이 (검열을 나온) 사람들이 말을 못하는 거예요.

김태산: 아, 그렇게 기자 선생이 말을 하니까 저도 기억이 나네요. 평양도 80년대 후반에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우리 집, 집안에 다 방송을 달고 있었지 않아요? 그런데 음질이 지지지지 하면서 말이 나왔다 끊어졌다 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왜 이러지? 하면서 방송을 꺼 놓곤 했는데 방송 다이얄(циферблат - 음량조절기)을 조절하는데 먼지가 끼면 그럴 수 있겠다 해서 내려놓고 닦아보곤 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그게 이유가 있었군요. 평양도 방송음질은 지방이나 같았어요.

기자: 그러니까 유선방송 검열을 나오면 동네 사람들이 막 난리를 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체신소 사람들이고 방송은 체신소에서 내보내니까 "야, 당신들 방송검열을 하기 전에 방송이 제대로 나오게 해달라. 그러고 방송검열을 해라. 당신이 한번 켜보고 들어보라"…

김태산: 평양도 그랬는데 지방까지 방송 음질이 좋을 수가 없죠.

기자: 네, 그러니까 방송검열을 나온 사람들도 검열을 하는 흉내만 내는 거죠.

김태산: 형식만 갖추었겠죠.

기자: 그 사람들도 자기네 집에서 방송을 안 켜놓고 있을 거예요. 근본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서 나중엔 가정집에서 유선방송이 점차 사라져가더라고요. 없어지는데 또 방송을 없앤다고 "방송이 안 나와도 없애지는 말라. 가지고는 있어라" 그러는데 벌써 90년대 초에 들어서니까 방송이 잘 나오나 안 나오나 하는 걸 검열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유선방송이 있냐 없냐를 검열하는 거예요.

김태산: 방송 존재만 확인하는 거죠. 그러니까 해당부문 일꾼들도 눈가리고 '야옹' 하는 거였죠.

기자: 네, 검열을 나오면 "자, 우리집에 방송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여주면 돼요. 방송을 켜 놓았나, 꺼놓았냐? 소리가 나오나 안 나오나 애초 이런 건 검열도 안 해요. 그런데 한가지 유리한 점이 뭐냐면 유선방송에 6V의 전기가 흐릅니다. 그런데 국가정전이 됐다 할 때에도 전화와 방송망은 살아있지 않습니까? 정전이 되면 거기에다 손전지용 전구를 양쪽 선에다 연결을 하거든요.

김태산: 방송선에다 연결해서? 아, 6V면 전지불은 켜죠.

기자: 네, 우리학급 애들 다 그랬어요. 정전이 되면 방송 선에다 연결해 소전구를 켜는데 이게 말에 따라 전구가 반짝반짝 해요.

김태산: 음파에 따라서 밝기가 달라지겠죠.

기자: 네, 그래서 평활소자라는 걸 달아줘요.

김태산: 3극 소자를 달아 준다는 거네요.

기자: 네, 음파가 끊어져도 전구 빛이 천천히 사라지게, 집집마다 방송은 안 나와도 모두 그걸 다 켜느라 방송선이라는 게 사실 그래서 필요했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야, 넌 어떻게 하냐?" 우리 젊은 애들끼리 그런 정보를 많이 공유하거든요. "이렇게 하면 불이 더 밝게 오고 더 오래 지속되고 이런다" 그렇게 돼서 방송선이 선전선동수단이나 유사시에 대비한 수단이 된 것이 아니라 개인집에서 등잔으로 활용된 거죠.

김태산: 생활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거군요.

기자: 네, 거기서 더 나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니깐 그 다음엔 사람들이 방송 선을 다 잘라낸 거예요. 왜냐면 방송은 애초에 안 나오지 않았습니까?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방송은 안나왔어요.

김태산: 그 원인이 뭡니까?

기자: 방송 중계공들이 나와야 하는데 방송도 중계공이 있고 중계기가 있습니다.

김태산: 아, 저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걸 평양에서 맞았으니까 평양은 그래도 방송이 살아 있었는데 지방은 그 마저도 아예 죽어버렸네요.

기자: 네, 중계공들이 안 나오니까 방송이 애초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에 못을 생산하지 못했어요. 농촌은 판자를 많이 다루지 않습니까. 판자로 창고를 짓는다든가 무슨 건설을 하려면 못이 없으니까 그 방송 선이라는 게 강철선이 아니에요. 7미리 못을 만들기에 정말 안성맞춤입니다. 그래서 방송 선을 다 잘라서 못을 만드는 거죠.

김태산: 아, 그러니까 국가공용방송 선을 몰래 잘라다 못을 만들어 개인생활에 썼다는 거군요. 그런데 알아보니까 지금까지도 농촌들은 그 방송 선을 회복 못했다고 해요.

김태산: 그런데 김정일 시대에 그걸 알았으면 도당선전비서쯤은 총살당하고 남았겠는데요?

기자: 그래서 방송선을 복구하라, 복구하라 계속 지시는 내려왔는데 그런데 뭔가 하면 국가에서 선을 주는 게 아니라 "너희 절로 돈을 모아서 방송 선을 사서 복구하라는 거예요. 아니, 복구 해 놓으면 누가 또 잘라갈 판인데 누가 복구를 합니까? 그리고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개인들로부터 돈을 거두어서 방송 선을 사라, 이게 말도 안 되는 거죠.

김태산: 그때엔 그렇게 하면 (주민들로부터) 맞아 죽는 거죠.

기자: 그리고 방송선 따로 전주대를 쓰던 구간이 많았거든요. 그 전주대를 다 베어다 화목으로 이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방송이라는 게 자연히 다 없어지게 되고 제가 탈북을 할 때까지 그 방송은 회복되지 않았어요. 방송이 허물어지는 것과 함께 북한의 선전선동 수단들은 다 무너졌다고 보면 됩니다.

김태산: 그거 무너지면 국민들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북한에 이젠 뭐 남아있는 정치수단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네요. 전 그래도 경제만 그렇게 되고 아직도 정치선전 수단들은 유지가 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참 오늘 기자 선생을 통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듣네요.

기자: 다 허물어 졌습니다. 이젠 뭐 사상으로 통하는 사회가 아니다.

김태산: 사상으로 통하는 사회는 아니고 철저히 독재사회네요.

기자: 네, 그리고 '공포정치'죠. 그걸로 북한은 체제를 유지할 뿐입니다.

김태산: 네, 내가 1960년대 초에 처음으로 방송을 들었던 때로부터 한 60년 지나서 결국은 아예 없어지고 말았네요.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오늘 정말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김태산: 아 네, 저는 기자 선생을 통해서 북한에 변화되는 과정에 대해서 제가 상상도 못했던 자료를 많이 들었고 이자 듣고 보니까 북한 사회가 참 갈데까지 다 갔구나 하는 걸 많이 느끼게 돼서 저도 정말 감사합니다.

기자: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