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김태산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김태산: 네, 문 기자님 오래간만입니다.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전 시간에 북한의 대중선전 선동수단으로서 첫 텔레비죤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오늘도 역시 북한의 텔레비죤 방송의 역사를 놓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북한에서 텔레비죤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 어느 때부터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김태산: 북한에서 텔레비죤은 1960년대 말, 1970년대 중반을 거쳐서 점차적으로 자체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해외에서 많이 수입해다가 그것도 간부들에게만 공급했죠. 평양을 비롯해서 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한테만 풀다나니 이제 군에는 군당책임비서나 군행정위원장, 교육자 대회에 참가하면 거기에 참가했던 사람들, 뭐 이렇게 돼서 어쨌든 간부들만 먼저 텔레비죤을 보게 됐던 건 사실입니다.
기자: 저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제 앞으로 텔레비죤이라는 게 나오면 집에 앉아서도 저기 미국에서 축구경기를 하는 것도 볼 수 있고 영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고 하니까 "아, 텔레비죤이라는 게 망원경처럼 그렇게 생긴 물건인가보다. 그걸 이제 눈에다 가까이 대면 산도 뚫고 바다도 뚫고 자기가 볼 수 있는 데까지 마음대로 볼 수 있는가 보다" 그래서 미국에서 뭘 하는 것도 볼 수 있고 영국에서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있고 실시간으로 그렇게 보는 줄 알았대요.
김태산: 아, 그럴 수도 있죠. 물리에서 음성은 전파를 통해 날려 보낼 수 있는데 색깔을 가진 사람이면 사람의 형체라든가 산이면 산 그런 형체를 전파를 통해 보낸다는 건 그때 당시 저로서도 참 이해되질 않았어요. 그런데 실제 텔레비죤을 보면서 "야, 저런 것도 있긴 있구나"하고 우리나라(북한)에선 저런 걸 언제면 생산하지? 그때는 소련에서 들여 온 텔레비죤과 일본에서 들어 온 텔레비죤 밖에 없었거든요. 천연색텔레비죤은 일본에서 들여 온 걸 간부들한테 선물을 준 것을 봤는데 그 후에 이제 평양에도 "대동강텔레비죤공장"이라는 걸 세우지 않았습니까? 물론 부속, 자재가 없어서 제대로 생산은 못했지만 그게 1980년대 들어서면서 평양에도 텔레비죤 공장이 세워졌죠.
기자: 네, 텔레비죤을 본 중에 제가 제일 기억에 남는 게 그거예요. "금희와 은희의 운명"…
김태산: 아, 영화죠. 북한 예술영화죠.
기자: 네, 그게 1970년대 후반에 나왔는데 어떠했냐면 초기 영화관으로 나오는데 각 도에 영화필름이 한 틀씩밖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한 개 군에서 3일 동안씩밖에 못 돌렸거든요. 그것도 한국처럼 시간당으로 계속 돌리는 게 아니라 보통 저녁에 한번밖에 안 했습니다. 3일 동안 저녁에 한 번씩밖에 영화를 돌리지 못하면 영화관에 기껏해야 4백 명이 못 들어가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의 영화를 못 보는 거예요.
김태산: 그렇죠. 북한은 철저히 매 군마다 영화관이 하나씩 있지 않습니까? 영화를 낮에 돌리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꼭 퇴근시간 이후에 돌리는데 결국은 하루에 한번만 돌리는 거죠.
기자: 네, 그때 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 나왔다고 먼저 신문에 소개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몹시 기다렸는데 뭐, 볼 수가 없었어요. 엄마가 내 손목을 잡고 영화관에 갔는데 젊은 애들 같은 건 막 밑에서 표를 떼는 사람들, 영화관에 입장하는 사람들 어깨를 밟고 마구 뛰어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무지 안 되겠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안되겠다. 우린 못 보겠다"하고 우린 돌아왔어요. 북한은 정말 절도가 있는 사회인데 그 유일하게 규범, 질서, 이게 다 흐트러지는 곳이 영화관이 아닙니까?
김태산: 그렇죠, 네.
기자: 영화표를 떼려면 사람들이 밀고 닥치고 순서라는 게 없었죠.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그 무엇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영화관이었어요. 옛날에 보니까 영화라는 게 영사기로 계속 돌리다가 갑자기 끊어지지 않습니까?
김태산: 필림이 끊어지죠.
기자: 네, 필름이 끊어지면 사람들이 막 항의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까?
김태산: 네, 저도 그런 걸 경험했는데 딱 그 재미있는 순간이면 필림이 더 잘 끊어지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영화가 끊기면 사람들이 휘파람 불고 막 소리를 지르고 떠들고 하는 거예요.
기자: 네, 거기에 끼워들면 저는 죽죠. 그래서 텔레비죤으로 영화가 나오길 기다렸는데 대개 한달 정도 지나면 새로 나온 영화를 텔레비죤으로 방영했어요.
김태산: 말하자면 국영영화관을 통해 돈을 뽑을 건 다 뽑고 그 다음에 텔레비죤으로 보여주는 게 아닙니까.
기자: 그렇죠. 참 제가 기억하는 건 1970년대 말, 이때 영화표의 가격이 (북한 돈) 20전 이렇게 했어요.
김태산: 20전? 옳습니다. 그때 북한이 영화표 한 장의 가격을 20전, 25전 이상을 안 했습니다.
기자: 네, 그랬다가 어느 날인가 30전이라고 영화표에 찍혀나왔더라고요. 우표 비슷했는데 영화표는 길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영화표에 30전이라고 찍혀 나오니까 "이거 왜 알려도 안주고 값을 이렇게 높였냐?"라고 화를 내시던 생각이 납니다.
김태산: 그렇죠. 지금 10전, 20전이라면 웃을 분들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때 월급으로 봐선 그게 작은 돈이 아니었거든요.
기자: 그러다가 아마 1980년대 중반 지나서 영화표의 값이 1원20전, 이렇게 올랐어요.
김태산: 네, 월급이 오르면서 따라 오른 거죠.
기자: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 나오던 1970년대 후반, 사실 알고 보면 그때에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해서 이미 경부고속도로도 닦았고, 먹는 문제도 다 해결됐을 때가 아닙니까? '새마을 운동'이라는 걸 통해서 한국은 1970년대 말 먹는 문제는 정말 걱정을 안 할 그런 정도였는데 오히려 그때 북한이 배급에 의지해 살았죠. 사실 배급 700(성인 기준 하루 700그램)이라는 게 순수 배급에만 매달려 살자면 엄청 배가 고팠죠.
김태산: 형편없이 배가 고팠죠. 그 700이라는 것도 다 주면 모르겠는데 국가사정이 곤란할 때마다 이렇게 떼고 저렇게 떼고 하면서 600그램, 마지막엔 540그램까지 막 나가고 그랬지요. 그런데 어른 숫자가 많아서 하루 700그램의 배급을 타오는 가정은 좀 괜찮았는데 어른(성인)은 700그램짜리 배급을 타는 아버지 한 분 뿐이고 그 밑에 아파서 일 못하는 사람이나 어린 자식들의 경우에는 하루 배급이 300그램(유치원생), 400그램(고등학교까지) 이렇게 되니깐 사실 어른들 보다 아이들이 더 먹으면 먹었지 적게 먹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집도 그렇다 보니깐 저녁엔 거의나 죽으로 살았죠.
기자: 네, 죽을 먹으며 산 집들이 많았습니다.
김태산: 많았죠. 월말이 되면 이제 죽도 쌀죽을 못 쓰고 거기다 산나물이나 송기를 많이 넣었죠. 솔직히 저는 어렸을 때 점심은 거의 못 먹고 살았습니다.
기자: 네, 그런데 그 "금희와 은희의 운명" 그 영화를 처음 텔레비죤으로 방영하던 그날, 제 기억으론 그때 우리 마을에 텔레비죤이 있는 집이 세집이었어요. 지금은 인민반 규모가 대략 30~40세대였는데 그 당시엔 50세대, 60세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인민반에 텔레비죤이 3대밖에 없었으니까. 아이고 어른이고 오늘 저녁에 "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한다니까 다 모인 거예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초에 저녁도 안 먹고 텔레비죤이 있는 집에 와서 맨 앞에 앉느라고…
김태산: 솔직히 주인집이 밥 먹을 시간도 주지 않았어요.
기자: 아, 진짜 주인집 사람들 그때는 밥을 못 먹어요.
김태산: 그때는 텔레비죤을 가진 집이 오히려 죄인 취급을 당할 때니까요.
기자: 죄인취급을 당했죠. 새로 나온 영화를 한다고 할 땐 정말 대단했죠. 텔레비죤으로 방영하는 영화한편 때문에 온 동네에서 싸움이 나고, 그게 우리의 1970년대말, 80년대 초였습니다. 오늘 역시 그 시절을 돌이켜 보니 가슴이 짠하네요. 텔레비죤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하기로 하고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선생님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