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안녕하세요. 문성휘 입니다.
김태산: 네, 안녕하세요? 김태산 입니다.
기자: 과거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그때 그 시절, 우리 어렸을 적의 추억이나 김선생님이 겪었던 그 추억, 뭔가 비슷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무척 깊은 시골마을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임산마을, 그때 자기 또래들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함께 어울려 노는 유희오락이라고 할까? 제 어릴 때만 보아도 무슨 놀음을 한다하면 다 집체적으로 모여서 노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50년대, 60년대, 이때에는 그런 놀이 문화가 어떤 거였습니까?
김태산: 놀이문화, 그때 우리 할 때는 ‘망차기’…
기자: 망차기, 네 있었죠.
김태산: 계단별로 망 차며 올라가는 거. 그다음엔 ‘별까기’, 그 다음엔 ‘자치기’…
기자: ‘자치기’가 뭐죠?
김태산: 막대기에다 이제, 사리막대기 두 개를 가지고 머리를 쳐서 누가 상대편에게 잡히면 지고, 이렇게 노는 놀음인데 자치기라는 게 북한에서도 유명했어요. 그다음에 우리는 산골마을이다 나니 이제 강에 나가서 헤엄을 치며 고기도 잡기도 많이 했고 어쨌든 그때도 숨바꼭질을 하고 동네아이들이 모여서 밤늦도록 놀아댔죠.
기자: 네, 우리 어렸을 때엔 애들이 모이면 그 숫자에 따라 노는 방법이 다 달랐어요. 둘이 모이면 흔히 ‘못 먹기’, ‘딱지놀이’, 그리고 ‘뜀줄’, 이런 간단한 놀이들을 했고요. 애들이 많이 모이면 그때부턴 ‘줄넘기’, ‘제기차기’, 또 ‘담아치기’라고 베어링 알들을 서로 맞혀서 먹는 놀이를 즐겼어요.
그 중엔 북한이 금지시킨 놀음도 있어요. 우돈 ‘돈 따먹기’ 이게 교실에서 휴식시간이나 방과 후에 많이 놀던 놀음이었는데 먼저 동전 여러 개를 같은 면으로 책상 위에 쌓아 놓고 서로 번갈아 가면서 동전을 입으로 훅 불어서 면을 뒤집는 거예요. 불어서 면이 동전의 면을 뒤집는 애가 돈을 가지게 되는 놀음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자본주의 문화라고 하면서 학교들에서 강하게 통제를 했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 ‘땅 따먹기’라는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땅 따먹기라는 놀이는 우선 깨어진 사기그릇 조박을 돌로 다듬어 지금 한국의 5백 원짜리 동전크기로 만드는 거예요. 그걸 ‘따빠’라고 했는데 이 ‘따빠’를 손가락으로 쳐서 자기 영역을 넓히는 놀이였습니다. 이것도 과거 지주들의 욕심을 연상시키는 놀이라며 어린 학생들에게 일체 금지령을 내렸거든요. 그리고 우리 어릴 땐 동네에서 아낙네들의 싸움이 자주 있었는데 참 대단했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김태산: 네, 그때에는 여자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솔직히 아닌 말로 자기네끼리 그룹이 형성돼서 남의 말 전달하고, 전달해서 동네싸움도 일어나고…
기자: 네, 저도 기억이 나는데 동네마다 남의 말을 전달해 주어 이웃 간에 싸움을 조장하는 아주머니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런데 싸우면서도 또 빨리 화해를 했던 것 같아요.
김태산: 그렇게 하고 그때 어렵게 들은 살았지만 누구네 집에서 국수 누르면 또 그걸 매 집에다 돌려가지고 나눠먹고 불러서 먹고 그 집에 그릇이 가면 그 집에선 빈 그릇 못 주니깐 언젠간 뭘 해 담아가지고 또 보내주고 하면서 그때는 어쨌든 못 살면서도 인간의 정은 푹푹 흐르는 때였어요. 그런데 이 남쪽에 와서 보게 되면 지금 아주 잘 살면서도 옆집하고 뭘 나눠먹는 문화가 거의 없으니깐 사람 사는 재미는 그때보다 없어요. 솔직히…
기자: 사실 북한도 80년대 후반부터는 거의나 이렇게 모여서 노는 문화라는 게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김태산: 그렇죠. 저도 평양에 올라가서 80년대 초반부터 살았는데 옆집에서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저 형식적으로 아내가 못가면 제가 인민반회의에 드무니 참가했는데 누구네 집 사람이다. 누구네 집 아주머니다. 이렇게 얼굴만 보고 며칠에 한 번씩 마당청소 나가거든요. 층별로 나갔는데 그때 나가면 아 저게 옆집 아주머니구나 앞집 아주머니구나, 그저 그렇게 인사나 하고 지냈지 먹는 걸 나눠먹는 것도 몰랐고 우리 집에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사람 사는 재미는 없었어요.
기자: 아마 북한이라는 사회가 늘 폐쇄형이고 세습적인 전통을 계속 물려받다 나니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래서 이런 현상이 유지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당시 농촌에서 의료적 혜택, 이런 건 어떻게 받았는지?
김태산: 우리 농촌에 진료소라는 게 하나 있었어요.
기자: 아, 그때부터요?
김태산: 네, 진료소가 하나 있었어요. 의사 선생이 혼자 있었어요. 혼자 있었는데 리에 그때 안전원(경찰)이 하나 내려와 있었어요. 리 담당안전원, 그 다음에 그때 제가 어렸을 적엔 소비조합상점이라고 있었어요.
기자: 약 같은 건 어떻게 공급을 했어요?
김태산: 뭐 아프지 않아서 진료소에 가본 적은 없었는데 아프다고 진료소에 가면 감기약이라고 줘서 우리 엄마도 타오고 그랬는데 대체적으로 약이 없어서 조금만 중병이 나면 모두 군 병원으로 올라가라고 그래서 거기서 15리(4.5km)를 걸어서 군까지 다녔고 수송수단이 없다나니 맹장 같은 급한 환자들은 다 소달구지에다 싣고 한 두어 시간씩 가곤 했었죠.
기자: 네, 그랬죠. 저도 어렸을 적에 저의 아버지가 농촌에 갔다가 맹장염에 걸렸는데 뜨락또르, 트랙터에 실어서 왔어요.
김태산: 그때는 뜨락또르가 있었지만 우리 때는 뜨락또르를 보지도 못했어요. 60년대 그때까지만 해도 농촌에 뜨락또르가 거의 없었고 리에 자동차도 없었고 군에 하도 임산사업소가 있다나니 통나무를 실어 나르는 차들이 왔다 갔다 해서 하루에 차 한 대를 보면 잘 봤죠. 그러다나니까 농촌사람들은 아프면 거의 다 죽었죠.
기자: 저는 소달구지에 (환자를) 실고 오는 게 오히려 낫지 않냐,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왜냐면요. 저의 아버지는 뜨락또르에 싣고 거기에 이불을 깔고 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온 것도 뜨락또르라는 게 굉장히 구르지 않습니까? 아마 소달구지만 더 세게 굴 겁니다.
김태산: 저도 이제 6살 때 땅을 빼앗긴 지주가 그 제도를 반대해 나쁜 짓을 하다가 잡힌 걸 공설운동장에서 총살한다고 와 보라고 해서 리에서 소달구지가 가는데 내가 못 따라 가지 못하니 거기다 태워줘서 한번 소달구지를 타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뭐 선생님은 1970년대 태생이니 그때야 북한이 많이 발전했죠. 제가 태어난 때로부터 20년 후면 많이 발전한 거예요. 우리 리에도 그땐 뜨락또르도 들어왔고 자동차도 한 대 온다고 할 때인데 그래도 그땐 대단했어요.
기자: 맞아요. 뜨락또르가 분명 다녔습니다. 그땐 뜨락또르가 많이 다녔는데 저의 아버진 그렇게 구르는 뜨락또르에 타고 군에 있는 병원까지 오다나니 맹장이 다 터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대수술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어렸을 땐 말이에요. 뜨락또르라는 게 속도가 느리니까 계속 거기에 매달리는 놀음, 그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운전사들이 운전하면서 계속 뒤를 돌아봐야 하지 않아요. 애들이 매달리지 않나?
사실 그렇게 적재함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사고가 난 애들도 있고 좀 그랬는데 소달구지라고 하면 뭐가 제일 추억에 남나 하면 한때 거름을 다 받아낸다. 그리고 소가 길을 가면서 똥을 쏘면 도로가 어지러워진다고 ‘똥받이’라는 걸 다 했죠. 그 앞에 소몰이꾼이 타고 있으면 뒤로 우리 어린 애들이 슬금슬금 다가가 뒤에 살짝 소달구지에 얹어 타면은요 한참 모르고 달구지꾼이 그냥 소를 몰고 갑니다.
김태산: 그런데 어릴 땐 생각이 나는 게 겨울엔 왜 그렇게 춥고 눈이 많이 오던지, 저희는 운동화 아니면 고무신을 신고 겨울을 나는데 그땐 (인민군 창건일인) 2월 8일에 인민군대한테 (위문) 편지전달 하려 간다고 할 때 눈이 막 허리까지 치던 생각을 하면 그 못살던 때에 왜 그렇게 눈도 많이 왔는지… 남쪽은 1950년대, 60년대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는데 북쪽에서 전 어릴 때 점심을 거의 못 먹고 살았던 그 생각밖에 안나요, 솔직히…
네, 그때를 돌이키면 정말 기가 막히죠. 지금까지 우리들의 어릴 적,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네, 오늘 시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시간을 또 기대하겠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