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텔레비죤의 역사(4)

북한 조선중앙TV가 모든 영상을 HD 형식인 16:9 비율의 화면으로 바꾼 것으로 지난달 4일 확인됐다. 위의 그림은 조선중앙TV가 지난달 4일 방송 시작과 함께 내보낸 16:9 비율의 백두산 영상, 아래 그림은 전날까지 방송 시작과 함께 내보냈던 4:3 비율의 백두산 영상.
북한 조선중앙TV가 모든 영상을 HD 형식인 16:9 비율의 화면으로 바꾼 것으로 지난달 4일 확인됐다. 위의 그림은 조선중앙TV가 지난달 4일 방송 시작과 함께 내보낸 16:9 비율의 백두산 영상, 아래 그림은 전날까지 방송 시작과 함께 내보냈던 4:3 비율의 백두산 영상.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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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김태산: 네, 안녕하십니까? 새해를 축하합니다.

기자: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태산: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자: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지난 시간 우리는 북한의 텔레비죤(TV) 방송역사, 1970년대 텔레비죤으로 영화를 시청하던 그 과거를 되돌아보았는데요.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북한의 텔레비죤 대중화 실패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엔 텔레비죤이 그다지 많이 보급되진 않았습니다.

김태산: 많지 않았죠. 텔레비죤 파는 것 없지 않았어요? 파는 게 없는데 어디서 구해요?

기자: 저희는 텔레비죤을 1979년도에 받았어요. 그때까지 전자관 식이었는데 79년도에 처음으로 일본의 히다치가 만든 텔레비죤, 그걸 들여다 ‘소나무’라고 이름을 바꾸었죠. 그런데 영광스럽게 우리집이 토대가 좋다나니 제일 처음으로 ‘소나무’라는 텔레비죤을 놓았습니다.

김태산: 아, 그랬군요.

기자: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몇 년도에 집에 텔레비죤을 놓았습니까?

김태산: 저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학부를 졸업하다나니 중앙기관 무역기관에 배치를 받았어요. 그러다나니까 이제 그때 당시 무역기관들에 무엇이 있었냐 하면 국내에서 수출품들을 모아 사회주의 나라들에 내보내고는 그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수출 우대물자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내가 갔던 중앙기관에서는 러시아를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들에 아이들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붓을 만들어서 대량적으로 수출했거든요. 1년에 수백만 루블씩 벌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벌면서 국가정책에 따라 벌어들인 외화의 10%는 외화상품을 사다가 생산자들에게 장려상품으로 주게 되었어요. 그러다가나니까 소련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텔레비죤과 냉장고가 많이 들어왔죠. 그걸 수출품을 생산한 기업소들에 돌려주게 되었어요. 그러다나니 거기서 농간이 생기는 거죠. 수출담당 지도원의 집에 텔레비죤이 없는데 아랫사람들이 가지면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까 하나씩 주는 거죠.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기관에 가다나니 빠르게 텔레비죤을 집에 놓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중앙기관에 배치 받았다고 해도 텔레비죤을 빨리 못 놓았죠.

기자: 처음으로 놓은 텔레비죤의 이름이 뭐였습니까?

김태산: 그때 제가 처음으로 놓은 텔레비죤이 ‘포톤’이었어요. ‘포톤’은 크지 않았어요? 컸어요. 그러다가 그 보다 좀 작은 게 이젠 30년이 지났으니까 이름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러시아가 점차 발전하다나니 좀 작은 것들을 만들어서 집에 비록 흑색이지만 텔레비죤을 2대 놓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저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시작할 때가 돼서야 천연색 텔레비죤을 바꾸어 놓았어요.

기자: 네, 그땐 대회에 가면 흔히 ‘오메가’ 이런 손시계 아니면 김일성의 명함시계 ‘세이코’, 그리고 텔레비죤을 주는 게 제일 영광이었죠. 그 전자관식 텔레비죤 ‘템프’, ‘포톤’…

김태산: 당시엔 그저 대회에 간다하면 그걸 바라고 가는 거죠 솔직히…

기자: 대회에 참가한다면 이번에 텔레비죤을 주냐 아니면 명함시계를 주냐, 이게 완전히 초미의 관심사였죠. 텔레비죤을 받는다면 대단한 영광이었죠. 제가 그때의 생각을 해보니까 북한이 1970년대 말이었는데 전기는 그때에 항시적으로 왔어요. 그런데 그때에 벌써 220V 표준전원을 못 맞추었어요.

김태산: 그렇죠.

기자: 왜냐면 ‘소나무’라는 텔레비죤이 빨간 ‘소나무’가 있고 까만 ‘소나무’가 있지 않습니까? 맨 처음 나온 것은 까만 색으로 새긴 것과 검은 색으로 글씨를 새긴 것이 있었어요. 맨 처음에 나온 소나무는 까만색으로 상표를 새겼거든요. 근데 그건 반도체인데도 전압이 약하면 이렇게 화면이 양쪽으로 쭉 줄었어요. 관식 텔레비죤이 흔히 잘 그렇지 않았습니까?

김태산: 그렇죠. 전압이 약하면 화면이 줄죠.

기자: 그런데 2차로 빨간색으로 상표를 새긴 ‘소나무’부터는 아무리 전압이 낮아도 화면이 꽉 찼거든요. 그래서 “야, 이거 첫 술을 뜬다는 것도 아니구나” 처음 ‘소나무’ 텔레비죤을 받았을 땐 정말 세상이 다 떠나가게 기쁘더니 후에 빨간 ‘소나무’가 나왔는데 그건 전압이 낮아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까만 ‘소나무’는 전압이 170V 아래로 떨어지면 애초에 켜지지 않았어요. 화면이 나오다가도 확 꺼지거든요. 그래서 그때에 벌써 단상변압기라고 해서 그걸 도랑크라고 했던가?…

김태산: ‘도란스’, ‘도란스’라고 했죠. 그걸 280V까지 올리게 되지 않았어요.

기자: 250, 250V였죠.

김태산: 그랬죠. 그걸 250V까지 올리고 크기에 따라 전기 용량도 달랐는데 매 집에서 텔레비죤을 보자면 그 도란스, 말하자면 전압을 올리는 변압기죠. 그걸 놓지 않으면 텔레비죤을 보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북한이라는 게 솔직히 여기 대한민국이나 자본주의 나라들과 다른 게 그 주민공급용 전기를 따로 설치했으면 전압이 220V로 안정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건 공업용 전기와 주민용 전기를 분간하지 않고 그냥 한 선으로 해서 여기서 공업용으로도 쓰고 주민용으로도 가르다나니 공장이 많은 지구엔 전압이 딸려 텔레비죤도 못 보고 우리 집에 냉장고가 있어도 돌아가지 않아 쓰지 못했죠. 그래서 항상 매 집마다 도란스가 있었죠.

기자: 그리고 그때 저희들도 텔레비죤을 놓으면서 정품, 변압기도 공장에서 만든 정품이 있고 개인들이 만든 가품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린 정품 변압기를 놓았는데 상표가 ‘대안전기공장’이었어요. 그때에 벌써 전압이 약하니까 전압을 올릴 수 있는 변압기를 ‘대안전기공장’에서 만들어 판매한 겁니다. 아마 관식 텔레비죤 때문에 변압기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김태산: 그렇죠. 전자관식은 전압이 약하면 전자관을 달구어 주지 못하니까 텔레비죤을 볼 수 없었던 거예요.

기자: 처음 반도체 텔레비죤이 나온 게 ‘소나무’였는데 실은 그 이전에 선물로 반도체 텔레비죤을 주었어요. 제가 알건 대는 정말 극히 적은 책임비서들, 이런 사람들한테 ‘목란’이라는 텔레비죤을 주었어요.

김태산: 일본에서 다 들여다 준 거예요.

기자: 네, 그것도 역시 일본 히타치였는데 ‘목란’이라는 텔레비죤을 놓았던 생각이 납니다.

김태산: 좋았죠 그게 그때로서는 최상의 텔레비죤이었죠.

기자: 저도 군당 조직비서네 집에 가서 처음으로 천연색 텔레비죤을 보았는데 멋있더라고요. 흑색을 보다가 처음으로 천연색이라는 걸 보니까 “야, 이제야 진짜 텔레비죤을 본다” 그런 감정이었어요.

김태산: 지금 보라면 누구도 안 보죠.

기자: 아, 그리고 후에 보위원들이 받은 선물, 그건 ‘샤프’였어요. 일본의 ‘샤프’ 텔레비죤을 ‘진달래’라는 이름을 붙여 선물로 준 거예요.

김태산: 아, 그래요?

기자: 네, 그것도 텔레비죤도 선물로 주면 그저 주는 게 아니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보내주신 선물” 이렇게 써서 박아놓지 않아요? 그러니까 너무 억울했던 건 내가 살던 고장에 책임비서나 조직비서네 집은 천연색 텔레비죤이 두 대씩이나 있어요. ‘목란’ 두 대를 가지고 있는데 다 위대한 수령님(김일성) 선물이에요. 그러니까 남을 주지도 못해요. 제 형제나 부모가 텔레비죤이 없는데도 주지 못해요. 선물을 누구한테 주었다간 목이 날아나니까. 그런데 한 80년대 중반 가니까 사람들이 천연색 텔레비죤이라는 걸 가지고 있지는 못해도 좀 볼 수 있을 그런 정도로 천연색 텔레비죤이 있었어요.

김태산: 흔하게 접할 수 있었죠.

기자: 그 다음에 또 ‘대동강텔레비죤공장’에서 일본의 ‘도시바’와 자체로 ‘목란’이라는 천연색 텔레비죤을 조립하기도 하지 않았어요?

김태산: 아, 그랬어요?

기자: 네, 생전에 김일성이 1975년 노동당 제5차대회에서 “온 나라 텔레비죤화”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놓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1980년대 말까지 북한의 텔레비죤 보급 상황은 빈약하기 그지없었죠.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오늘도 텔레비죤 방송을 놓고 북한의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 오늘 얘기 감사하고요. 다음 시간을 또 기대하겠습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