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유선방송의 역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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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문성휘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책임지고 체류하던 중 2천년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 선생과 함께 합니다.

기자: 선생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김태산: 네, 염려 덕분에 건강하게 잘 지냈습니다.

기자: 넘어져서 허리를 다쳤다고 하시던데?

김태산: 이젠 늙긴 늙었나 봅니다.

기자: 넘어져서 허리까지 다쳤다니까 꽤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데…

김태산: 그래요. 거의 네, 거의 두 달 나마 누워 있었어요.

기자: 요전에 어느 탈북자가 허리 디스크 수술을 했어요. 그래 방문을 했는데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까 하는 말이 자기도 좀 힘들 줄 알았는데 그 앞에 교정기구가 있고 컴퓨터를 놓은 거예요. 그걸로 그동안 못 본 영화, 드라마 다 보고 있다고.

김태산: 아, 심심치 않겠군요.

기자: 네, 그래서 전혀 심심치 않다고, 조금씩 화장실 가거나 그런 때에만 힘들 뿐이지 “영화를 다 보는 것만 해도 내 일생 소원을 다 푸는 것 같다”해서 “어, 이런 좋은 점도 있어?

김태산: 화가 복이 된 셈이군요.

기자: 네, 허리 아픈 게 막 부럽기도 하고 그런 때가 있더군요.

김태산: 아이고 정작 아파 보세요. 미치는 겁니다. 왜 그러세요?

기자: 그래도 나도 역시 ‘영화광’인데 그렇게 하루 종일 누워서 영화를 본다는 거 엄청 부럽더라고요. 북한에 있을 땐 80년대였죠. 주로 일요일 날 텔레비전에서 외국영화를 방영하지 않았습니까?

김태산: 그렇죠. ‘만수대’ 통로(채널)에서 하는데 참 기다려지는 날이었죠.

기자: 네, 그런데 지방은 ‘만수대’ 통로가 안 나옵니다.

김태산: 안했죠. 평양에서만 방영했으니깐.

기자: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도 주말엔 중국영화나 소련영화들을 자주 방영했거든요. 그게 참 기억에 많이 남았고 그런 영화를 볼 때면 텔레비전(TV)가 있는 집들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모여서 막 죽어났죠. 그런데 북한에선 자기네가 한국보다 먼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이렇게 선전하고 있거든요.

김태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자: 네, 시기적으로 북한이 한국보다 먼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실제 북한은 1963년 3월에 “평양텔레비전방송국”을 개설하고 첫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평양을 중심으로 송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을 맞으며 “조선중앙텔레비죤”으로 이름을 바꾸고 북한 전역에 방송을 시작했거든요. 북한은 이 “조선중앙텔레비죤”으로 이름을 바꾸어 전국에 방송을 시작한 1970년 4월 15일을 공식적인 텔레비전 방송 개시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또 한국은 북한보다 3년 후인 1973년 3월부터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이렇게 선전하고 있거든요. 그 이전엔 라디오밖에 못 들었다.

김태산: 아, 그렇습니까?

기자: 그런데 이게 완전히 왜곡된 선전이라는 거죠. 먼저 간단히 한반도의 방송역사를 거슬러 보면 1927년에 “경성방송국”이 설립됐는데 이게 라디오 방송이었습니다. 당시엔 “경성방송국”이 일본의 라디오 방송을 중계하는데 불과했는데 한국어와 일본어를 함께 사용한 혼합방송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후 1947년 9월 3일부터 한국 독자적인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도 북한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한국에서 첫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에 최초로 시작을 했습니다. 당시 “대한방송주식회사”가 설립돼 텔레비전방송을 시작했고 1961년 12월에 한국의 국영방송인 KBS 텔레비전 방송이 송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국영방송이 아니고 상업적인 ‘주식회사’로 설립된 방송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대였던 1973년 3월에 KBS 텔레비전 방송을 국영방송으로 전환되었거든요. 그러니까 북한은 한국에서 ‘주식회사’로 설립됐던 KBS 텔레비전 방송이 국영방송으로 전환된 1973년을 한국의 첫 텔레비전 방송 개시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방송을 시작한 1970년보다 3년 후인 1973년부터 한국에서 첫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이렇게 왜곡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북한이 라디오를 듣던 역사, 텔레비전을 보던 역사, 되게 궁금한데 제가 어렸을 때 벌써 집에 유선방송이 있었어요.

김태산: 그렇죠. 기자 선생이 유선방송을 들었을 때가 몇 년도입니까?

문성휘: 그게 1977년?

김태산: 아이고 네, 뭐 유선방송이 (6.25) 전쟁 끝나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 끝나고 ‘전후복구건설’ 그 이후부터 유선방송이 있었어요. 제가 어릴 때 1960년대 초에 유선방송을 들었거든요.

기자: 아, 그렇게 빨리 시작한 겁니까?

김태산: 그렇죠. 그런데 유선방송이 어떻게 나왔나 하면 제가 초등학교 때니까 64년도, 65년도 이때거든요. 방송이 나왔는데 우리 집이 자강도 산골이다 보니까 이에서도 한 1.5km, 한 1천5백m 떨어진데다 보니 전기도 그때 우리 집엔 안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때 벌써 유선방송이 있었어요. 이 소재지에 스피커가 달려있고 집집마다 (유선)방송이 있었거든요. 방송(스피커) 그 자체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방송을 만들어서 팔았어요. 그 것이 유선방송이다 보니까 방송을 들으려면 (방송)선이 들어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집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전기)선이 부족했으니까 우리 아버지와 형들이 어떻게 하나 방송은 들어야겠다면서 와이어로프를 불에 태워 풀어가지고 연결을 해서 어떻게 들었냐면 아직도 생생한 게 북한 사람들이 그때 220 전기선 한 선에다 방송을 연결했다고 해요.

기자: 네, 맞습니다.

김태산: 이 소재지에서 우리 집까지 형들이 막대기를 파 세워가지고 그 한선만, 방송선이 원래 두 개의 선이 들어와야 잘 듣는데 한 선만 연결해서 우리 집까지 와서 한선은 ‘아스(지선)’시킨다고 하면서 땅속에다 쇠꼬챙이를 파서 연결을 해서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그때 처음으로 들은 게 무슨 공작기계 1만대 생산. “공작기계(공업용선반) 새끼치기 운동” 그러면서…

기자: 아, 맞습니다.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김태산: 네,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그러면서 김일성이 그때 하는 말도 “위대한 레닌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습니다” 하는 거, 그 후에 제가 커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습니다”하던 그걸 그때는 김일성이 내각수상이었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아마 우리 세대뿐일 겁니다. 최초에는 김일성이 그렇게 방송을 했어요. 그걸 우린 어릴 때 들었던 생각이 나요. 그런데 그 방송이 겨울이면 땅이 바짝 건조하니까 땅에 박은 쇠꼬챙이가 접지가 안 되니까 잘 안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형들이 소금물을 풀어서 땅에 박은 선에다 쏟고 우리 셋째형은 장난꾸러기니까 거기다 오줌을 싸더라고요. 우리 형이 오줌을 싸서 방송을 듣던 생각이 나는데 어쨌든 60년대 초반에 방송이 있었어요. 지금도 북한엔 “제3방송”이라고 집집마다 스피커가 다 있지 않습니까. 라디오 전파를 타지 않고 오직 북한 사람들만 듣을 수 있는 거였어요. " 3방송‘이라는 게 전쟁, 사이렌이 울리고 “방공호로 다 들어가십시오” 이런 건 딱 “3방송”으로만 하지 않습니까. 그게 1960년대부터 제가 들은 방송의 역사입니다.

기자: 아, 그렇게 됐군요. 네,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저는 그래서 북한의 방송, 전기, 텔레비전, 상수도 이런 기초생활 시설들이 언제 다 구축이 됐는지 이런 게 무척 궁금한데요. 1960년대에 유선방송을 놓아서 집집마다 김일성의 말을 다 들었다고 하니까 참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김태산: 그렇죠. 북한이 그 정치선전선동사업에서는 어느 나라보다 앞섰다고 봐야 합니다. 그때 사실은 김일성의 교시나 당의 선전사업을 인민들한테 내려 먹이기 위해서 방송을 앞세워 놓았던 것입니다.

기자: 네, 오늘 시간을 통해 제가 모르고 있던 북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요. 방송과 관련된 역사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 하기로 하고 “그때 그 시절 속으로”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태산: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