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실향민들은 6 25 60년을 맞으면서 당시의 참혹했던 피난길의 아픔을 상기조차 하기 싫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가족과 생이별 하게 됐다고 하소연합니다. 보고 싶은 가족 때문에 눈물도 말라 버렸지만 지금도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북한을 바라보면서 더욱 슬픔에 잠긴다고 이야기합니다.
6 25 특집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1950년 전쟁 당시 피난민 만 5천 명을 이끌고 남한행에 성공한 미국 버지니아에 사는 올해 80의 김 할아버지의 피난길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김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6일 원산부두에 약혼녀를 찾으러 나갑니다. 그러나 원산부두는 인산인해로 약혼녀를 찾지 못하자 약혼녀 찾기를 포기하고 원산에서 30리 떨어져 가족이 있는 곳에 갔지만, 인민군 때문에 다시 가족과 헤어지는 신세가 됩니다.
: 어머니가 빨리 피하지 않으면 인민군이 이 마을에 들어올 줄 모르니까 빨리 피하라고 해서 '어머니 그럼 알았습니다. 내가 3일 밤만 지내고 오겠다' 하고 동생 손목을 잡고 떠났어요. 12월 6일 날 눈이 조금씩 내리면서 어두컴컴한데 그 동내에서 떠나 큰길 어귀에 나오니까 피난민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나오더니 완전히 어두워 졌을 때에 만원이 되었어요. 제가 떠난 마을에는 인민군이 내려왔는지 무엇이 타는 불빛이 올라오고 그래요. 그래서 동생한테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내가 어머니 모시고 와야겠다' 그랬더니 동생도 따라간가고해서 거길 가지 못하고 그길로 피난민 속에 끼어서 같이 떠나기 시작한 것이 어떤 목적지가 있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 국군이 후퇴해 있는 섬까지 가서 국군을 만나기 위해서 남쪽을 향해서 보따리를 이고 걷기 시작한 겁니다. 국군을 만날때까지 35일을 걸었어요. 35일간 밤에만 걸어서 강릉지역까지 내려와서 수도사단 26연대 수색중대를 만나게 됐습니다.
만 5천명의 피난민을 이끈 김 할아버지는 인민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평양 인근에서 빼앗아 무장하고 있었다고 들려줍니다.
: 그 당시 인민군이 남침을 해 가지고 3일만에 서울에 내려갈 때 거기서 노획한 총, 실탄 등을 평양으로 빠지는 길목에다 비축을 해 놨어요. 그리고 쌀도 거기다 쌓아 뒀어요. 그것을 우리가 가서 보초를 습격해서 총을 빼앗아서 (M1 소총, 소련군이 갖고 있던 쌍총이 더 많았어요.)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35일동안 걸어 남으로 가면서 그래도 배고픔을 달래수 있었던 것은 피난간 부락의 집들에서 만든 주먹밥으로 해결 했다고 전해 줍니다.
: 주먹밥 하나라도 있으면 나누어 먹을 정도로, 내려오면서 1950년 겨울에 먹으려고 김장들을 다 해 놨어요. 그게 익을 무렵에 전부 피난가고 빈 동내였어요. 할머니나 한분 계시고, 할아버지 한분 있을 정도로 그리고 가마니를 쳐놓고 자곤 했어요. 거기서 가지고 온 쌀, 빈집에 있는 김치 등을 끄집어내서 먹고, 그렇게 연명하면서 남으로 갔지요.
김 할아버지는 만 5천 명의 생명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진두지휘를 했다고 말합니다.
: 걸어오는 과정이라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복잡한 도중에 훈련도 받지 않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보따리를 인 사람들한테 교육을 하지 않았지만, 비행기 소리만 나면 모두가 조용히 해라 비행기에서 듣는다고 해 가지고 한 만 5천 명이 넘었는데 제가 제일 선두에 서서 병력지위를 할 능력도 없지마는 여하간 누군가가 지휘를 하지 않으면 제각기 마음대로 할 것 같아서 제가 따발총을 둘러매고 사복한 우리 민간 청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 우리 부대를 편성해서 중간과 후미를 통솔해서 밤에만 걷기 시작한 것이 강릉 쪽에 도착했는데 국군을 만났을 때 국군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 눈이 오지 않는 밤에 달이 떴는데 철길로 걸어오는 행렬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아마 수색중대 요원이 보초를 서 있다가 우리에게 수화를 하는 거예요. 그래 자기 정면에 있는 사람은 적으로 알고 쏘아야 하는데 긴 행렬이 보이니까 쏘지 못하는 거예요. 그 당시 국군 복장 같지 않고 중공군 복장 같았어요. 그 군인들을 만나서 '당신들 국군이야! 중공군이냐! 그런데 보니까 국군이 처음으로 입은 방한복이었어요. 누빈 옷을 입고 총을 보니까 M1 소총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피난민이다. 제일 선두에 내가 있는 것이고, 너희 장교를 만나야겠다'고 말했더니 유엔군 장교(북진할 때 본 장교) 같아요 보니까. 그 장교가 플래시를 들고서 있어서 '당신들 국군이 틀림없지요' 했더니 그 많은 사람이 누가 하자는 말도 없이 거의 동시에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나하고 무슨 약속을 했냐 면은 먼저 가지고 있는 총을 회수하고 낮에 절대 폭격을 하지 않겠다해서 지금 동해시라고하는 묵호까지 걸어 가게 된 거지요.
김 할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다시 한국군으로 강릉 전투에 참가했다고 당시를 들려 줍니다.
: 1951년 1월 15일 경이 겁니다. 묵호 국민학교에서 남쪽으로 내려 갈 사람은 오른쪽으로 우리와 함께 북진할 청년들은 왼쪽으로 모여 즉시 강릉전투에 참가(강릉에는 이미 중공군이 점령 했어요.) 수도사단 26연대 수색중대와 합동으로 우린 최전방에 참전 했어요. 강릉전투 3일만에 강릉을 회복했어요. 우린 그당시 군번도 없었어요.
김 할아버지의 6 25전쟁에 대한 회고를 들어봅니다.
: 저희들이 싸운 전쟁이라고하는 비참성은 말로 다 할수도 없고, 6 25는 북한에서 남침을 했고, 그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 불쌍하게 우리 민족만 희생이 되고 말았어요. 그 전쟁이 왜 시작이 됐고, 지금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거든요.형제간의 총질하고 부모를 향해 총질한 그게 바로 6 25인데 우리는 그 6 25전쟁을 생각하면서 내 눈으로 볼 때 너무너무 한심하고 나라에 대한 애국의 정신이 없다 그겁니다. 안보에 대한 의식을 우리가 가지고 안보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행복을 누릴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질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김 할아버지가 젊은 세대에게 주는 충언입니다.
: 젊은 사람들은 우리 우방 국가들이 이름도 모르는 조그마한 나라에 와서 얼마나 고생과 희생을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와서 지켜 줬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겁니다. 지상낙원 천국이라고 하는 기와집에서 이밥 먹고 6 25전쟁 전에 노동당원들한테서 기가 아프게 들었어요. 그것을 실천 못 하는 그런 북한을 우리가 빨리 통일을 해야 되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이 잘 알아서 정신 차리고 우리나라를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을 보고 싶으냐는 질문에 40년 동안 바라던 고향 이야기 지쳤다고 말합니다.
: 이제 보고 싶다가 제가 언제부터인가 이제는 죽어도 좋다. 저는 최전방에서 전투를 할 때 제일 선두에서 내 고향을 찾고 통일을 한다는 생각에, 한번 생각해 보세요. 1951년 1월 15일쯤 되어서 강릉까지 아무 이름도 없는 사람이 강릉 전투에 갔다가 나와서 육군 이등병 솜바지 저고리 옷을 입고서 북쪽에 고성이라고 하는 남강 쪽까지 가서 그렇게 전쟁을 하던 사람이 1971년에 저는 어떤 생각을 했냐 면은 늦어도 한 2년 후에 고향 소식이라도 듣겠지 하는 희망을 품었는데 내일 내일 이런 식으로 40여 년을 넘기면서 살았는데 너무 지쳐서 가족 만나는 것은 잊어버리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희망이라는 것도 가질 수도 없는 그런 상태예요. 왜냐하면, 제가 80이 아닙니까 가까운 친구들 지금 찾으면은 없어요. 미국에 와서 우리 군대 동기생이라든지 학교 동창들 생각이 나서 연락하면 죽고 없어요. 이제는 비참하다거나 슬프다는 것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김 할아버지가 해야 할 일은 전우의 무덤에 가보는 것입니다.
: 죽기 전에 죽은 전우를 묻어 두었던 곳을 가보자 하면서도 가질 못하고 있어요. 올해에도 왜 안오는냐고들 하는데 생각은 태산 같지요. 우리나이에 운전할 수 있을 때에 거기를 가봐야 되는데 말로는 가보지요. 그러나 그게 쉽지 않군요.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을때 라디오는 주파수를 고정한 라디오였다고 전해 줍니다.
: 제가 생각할 때 대한민국이 북진을 할텐데 북한이 거짓말 하는 건가 생각했어요. 매형이 하루는 저를 불러 지하실에 가니까 그 더운 날씨에 이불과 담요를 뒤집어쓰고 보니까 거기에 라디오가 있어요. 남한방송의 뉴스에서 뭐가 나왔느냐면은 피난 가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그 목소리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말 소리가 전파에 울려펴져 너무너무 눈물 겹더라고요. 그런데 인천상륙을 한 거예요. 9월 15일 인천상륙을 해 가지고 맥아더 장군이 밀고 올라오고 있는데도 인민군들은 낙동강 전투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김 할아버지 고향에 반겨줄 사람이 없다고 슬픔을 이야기 해 줍니다.
: 꿈에 그리는 내 고향이지 이제는 더는 생각하기 싫어요. 왜 생각하기 싫으냐면은 제가 북한을 떠나오면서부터 한 6년 동안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제 머릿속에 다 기억을 해 가지고 어머니한테 가서, 내 약혼자에게 가서 얘기할 거라는 부픈 가슴에 항상 군대생활을 즐겁게 했습니다. 16년 만에 제대를 했지마는 그런 생각에 부풀어 살던 사람이 지금 찾아가봐야 반겨 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고향에 가면 누가 있습니까 다 어디 갔는지 모르는데.
6 25 특집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1950년 전쟁 당시 만 5천 명의 피난민을 이끌고 남한행에 성공한 미국 버지니아에 사는 올해 80의 김 할아버지의 피난길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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