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북한이 직면한 총체적인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북한, 이게 문제지요' 시간입니다. 오늘도 대담엔 북한 전문가로 남한 국민대 교수이신 안드레이 란코프 박삽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순서에선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살펴보면 어떨까 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미 1950년대부터 핵개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오늘날 북한이 이처럼 핵에 집착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김일성이 남긴 유산이라고 봐야겠지요?
란코프: 그렇습니다. 북한의 핵개발과 핵무기는 김일성의 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한은 1950년대 말부터 핵무기에 대해서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0년대 말부터 북한은 러시아로 물리학을 전공한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보내기 시작했고, 소련을 통해서 핵 기술, 특히 핵무기 기술에 대한 정보를 합법, 불법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60년대 들어와 북한은 연변에 핵 연구 센터를 설치하였습니다. 북한은 어렵게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보면 핵개발은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정책은 김일성이 희망한 정책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변: 말씀하신 대로 북한처럼 가난한 나라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핵개발을 추진했다면 김일성의 결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했을 텐데요. 김일성은 왜 그토록 핵무기에 관심을 쏟았을까요?
란코프: 당시 북한은 미제 핵 무기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김일성은 아마 해방이 된1945년부터 핵무기를 절대적인 무기로 여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이 보기에 미국이 사용한 핵무기로 인해 일본이 투항했고, 7년~8년동안 아시아를 침략하고 미국과 싸우던 일본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도 핵무기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핵무기를 외국으로부터의 공습과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절대적인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일성이 핵무기 개발을 남조선을 통일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변: 사실 김일성은 1970년대까지도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고, 그래서 남한에 대해 이런 저런 도발도 많이 벌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북한은1976년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나뭇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2명을 도끼로 살해한 만행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김일성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통일에 집착했다는 뜻인데요?
란코프: 김일성 지도부는 1970년대 말까지 무력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자료가 지금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김일성과 동독 최고지도자 호네커 총비서와의 회담 기록이 발견됐는데 당시 김일성은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냥 통일보다는 김일성 식 통일, 김일성을 통일 국가의 절대지도자로 남아있는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일성에게 통일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통일은 제일 먼저 자신의 권력의 강화와 확대의 수단이었습니다.
변: 문제는 왜 김일성이 핵무기가 통일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느냐 하는 점인데요. 설마 김일성이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해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요?
란코프: 확실이 알 수 없지만 김일성 논리를 보면 핵무기는 미국이 남한을 도와줄 수 없도록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령 북한에 핵무기가 있었다면 북한 군대가 남한을 침략 할 경우 미군이 참전하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미국이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병사가 많이 죽을 전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희망은 북한 핵무기에 대한 공포 때문에 미국이 남한에 대한 침략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김일성은 핵무기를 무력통일, 강제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보다 억제력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변: 그런니까 김일성은 핵무기를 처음엔 통일의 수단을 여겼다가 나중엔 북한을 외부침략에서 막아주는 억지수단으로 생각했다는 말씀인데요. 김일성이 핵무기를 억제수단으로 생각했다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란코프: 제가 볼 때1980년대 들어와 김일성과 김정일이 핵무기에 대한 태도가 점차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소련을 비롯한 또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생한 붕괴 위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까지 핵무기는 억제력 수단과 무력 통일 수단으로 볼 수 있지만 80년대 이후부터 협박 외교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변: 김일성이 어떤 방식으로 핵무기를 외교적 압력으로 활용했나요?
란코프: 제가 볼 때1980년대 들어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남한에 대한 무력통일, 적화통일에 대한 희망을 사실상 포기했습니다. 북한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있는 반면에 남한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바라는 통일 즉 적화통일은 근거가 없는 착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정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김일성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 198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도 중국에서도 동 유럽에서도 소련 식 국가사회주의는 날마다 심각해지는 혼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건하에 김일성은 소련에서 예전처럼 원조를 얼마 동안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지원 없이 북한 경제가 살아남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핵무기를 다른 나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획득하기 위한 협박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 네, <북한 이게 문제지요> 오늘 순서에서는 북한의 핵개발도 김일성 시대의 유산이라는 점을 란코프 교수로부터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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