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북한이 직면한 총체적인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북한, 이게 문제지요’ 시간입니다. 오늘도 대담엔 남한 국민대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해방 후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에 관해 살펴보지요.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인 국내파 공산주의자 박헌영을 비롯해 소련파인 허가이, 연안파인 김두봉을 철저히 숙청하지 않았습니까? 한때 순수한 공산주의자였던 김일성이 당시 자신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할 만큼 그토록 잔인했나요?
란코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너무 복잡한 문제입니다. 사실상 스탈린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은 비상구가 없습니다. 스탈린 정치문화에서 고급 간부는 빠져나갈 비상구가 없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너가 나를 죽일 것이다’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민주국가는 물론이고 비교적으로 온건한 독재국가에서도 정치 투쟁에서 패한 정치인은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구가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정치를 그만두고 한 시민으로 돌아가 살 수 있는 겁니다. 설령 정치를 그만두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돈도 있고 영향력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탈린식 국가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스탈린식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치 다툼에서 패한 패자는 조용한 개인생활을 할 희망이 없었습니다. 살아남기도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패자들은 외국간첩이나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을 당하고 사형을 받거나 정치범 관리소, 수용소에서 옥사하였습니다. 1950년대 김일성은 이런 유감스러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비상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만일 그가 박헌영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박헌영이 김일성을 죽였을 것입니다. 스탈린 시대 공산주의 정책은 패자가 살아남기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변: 그렇군요. 그렇다면 김정은이 이끌고 있는 북한도 스탈린식의 국가라고 봅니까? 즉 정적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숙청하는 스탈린식의 국가 말입니다.
란코프: 제가 보니까 지금 조금 어렵습니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이 사망하던 1994년까지 북한의 정치 기본원칙은 원래 스탈린 시대 정치원칙에 따라 배운 것인데 기본원칙은 스탈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 사후 지난 15년 사이 북한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변: 만일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면 과연 북한의 운명은 어땠을까요?
란코프: 물론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만일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이 북한 최고지도자가 되었더라면 북한 문제가 김일성 때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가설적인 이야기여서 확실한 증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박헌영이든 허가이든 김일성이든 누가 정권을 잡았어도 북한 정치가 많이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유럽 공산주의 운동 역사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지도부에서 북한과 비슷한 정치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정치투쟁의 결과와 무관하게 그들 국가의 정치노선은 비슷했습니다.
따라서 북한에서 김일성이 아닌 박헌영이 북한 최고 지도자가 되었더라도 북한 민중의 생활에 별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경우 북한 학생들은 김일성이 미국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을 교과서로 배웠을 것입니다. 박헌영이 김일성을 죽였더라면 그를 미국 간첩이란 딱지를 붙였을 겁니다.
변: 결국 김일성이든 박헌영이든 누가 해방 후 북한의 정권을 잡았던 북한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란 말씀이군요. 그런 점에서 당시 상황으로 보면 북한의 미래는 누가 정권을 잡아도 비관적이었네요.
란코프: 저는 낙관주의자이지만 북한 역사를 보면 낙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북한 역사에서 이런 저런 결정이 많아서 결정의 대부분은 합리주의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결정은 마침내 심각한 참극을 야기하였습니다. 참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변: 지금 결정의 대부분은 ‘합리주의적인 설명’이 있고, 또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결정은 심각한 참극을 야기했다’고 했는데요. 저희 청취자를 위해 좀 구체적으로 쉽게 설명을 해주시죠.
란코프: 예를 들면 당시 남침을 준비하던 김일성의 논리를 보면 이렇습니다. 김일성과 허가이, 특히 박헌영은 1949년, 50년에 남조선 침략을 준비했을 때 자신들을 침략자로 생각하기보다는 해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남조선 현실을 보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의 현실을 보니까 해방될 사회주의 국가가 될 조선이, 통일될 조선이 잘 살 수 있는 국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당시에 그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근거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남조선을 침략하지 마자 쉽게 이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믿던 사회주의는 미래가 없는 정치, 경제체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빨리 잊을 수도 없고 결국 3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많습니다.
변: 네, 그렇군요. 지금 한국전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는데요. 자기들이 볼 때는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해 내렸지만 결과는 너무도 비참했군요. 결국 북한이 오늘날 경제가 붕괴돼 철저한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데는 그 원인을 김일성 개인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죠?
란코프: 북한 경제가 무너진 이유는 많긴 하지만 기본적인 이유가 극복하기 어려운 국가사회주의 구조적인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이 체제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절대독재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체제의 포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또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인적인 논리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결국은 김일성 개인성격의 붕괴입니다. 김일성은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1994년 죽을 때까지 조국을 위해서 싸우는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1930년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인들의 행복을 위해서 고생했던 김성주와 1990년대 세습독재국가를 세우고 봉건주의시대 임금보다 더 극한 찬성을 받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던 김일성은 육체적으로 같은 인물이었지만 성격적으로는 아주 달랐습니다. 제가 보니까 독재자는 너무 위험한 직업입니다. 그 때문에 독재자의 성격은 그의 도덕, 윤리는 다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일성은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변: 말씀 감사합니다. <북한, 이게 문제지요> 오늘 순서에서는 자신들의 정적을 무참하게 숙청한 김일성의 잔인한 면모, 김일성의 파탄적 성격으로 북한이 실패한 나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해 란코프 교수님으로부터 들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