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오중석, 김철웅의 음악 산책입니다.
오중석 : 음악을 통해서 남북한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일의 삶을 살펴보는 <음악산책>. 오늘순서는 한반도의 격동기였던 지난 40년대와 50년대 남북한에서 함께 부르고 즐겼던 노래들을 돌이켜보는 시간으로 마련합니다.
철웅 씨가 태어나기 전 얘기니까 철웅 씨 부모님 세대가 좋아하셨던 음악 얘기가 되겠네요. 어렸을 적 부모님이 자주 부르시던 노래, 기억나는 게 있나요?
김철웅 :
저희 아버지 때보다도 할아버지 세대가 즐겨 부르셨다는 노래 중에 몇 곡이 생각나는 데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고복수의 ‘타향살이’,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같은 노래들이 해방을 전후해서 고향 어르신들이 애창하던 노래였다고 합니다.
북한이 공산화된 후 한참 있다 태어난 저로서는 어른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부모님으로 부터 그런 노래들이 5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 지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고 얘기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럼 북한에서도 유행했던 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 을 들어보실까요.
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
오:
지금 말씀하신 노래들은 1930년대, 그러니까 일제 때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노래들인데 남쪽에서는 지금까지도 50대 후반 이상 노년층에서는 널리 애창되는 유행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노래가 70년 가까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북한에서는 이런 노래들이 모두 금지곡이 되었다고 하던데요.
김:
그렇습니다. 일제 때 만들어져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가요들을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사상에 물든 퇴폐 반동가요로 몰아 철저히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그래도 50년대 초반까지는 암암리에 부르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다는데 북한정권 창설과 더불어 김일성을 찬양하는 혁명가요가 넘쳐나면서 부터는 철저히 금지해 부르는 사람도 없고 점차 잊혀 졌다고 합니다.
오:
사실 지금 말한 가요들은 일제 때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떠나야 했던 우리 한민족의 설움과 애환이 깃든 사연이 있는 노래들이죠. 일제의 탄압과 배고픔을 잊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보따리 이고 메고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야 했던 민초들의 감정이 노랫말에도 잘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은 제가 어렸을 적, 술 한 잔 얼큰하실 때면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시면서 일제시대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곤 하셨습니다. 제 어린 마음에도 가사 중에 “고요히 창을 열고 달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라는 대목이 왠지 좋아서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김:
저희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전까지는 8‧15 해방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다들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쪽과 북쪽이 같은 유행가를 함께 부르고 당시 인기 있던 유랑극단 같은 것도 남북한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공연하고 유행가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실제로 ‘눈물 젖은 두만강’ 이나 ‘홍도야 우지마라’ 등은 40년대 후반 북한에서도 인기 있는 유행가였다고 하는데요, 제가 태어나기 전 얘기라서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한의 유행가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
해방 후 남쪽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음악계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 왔는데요, 미군을 따라 들어온 재즈 풍 음악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단음계의 애조 띤 유행가에 식상해 하던 일부 유식층에 재즈리듬이 먹혀들게 된 거죠. ‘신라의 달밤’으로 인기 정상을 달리던 현인이 외국노래 '베사메 무쵸'를 우리말 가사로 불러 대단히 유행시켰는데 이 노래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에스빠냐 말로 키스를 많이 해달라는 의미의 “베사메 무쵸”를 여자의 이름으로 잘못 알고 우리말로 가사를 적을 때 ‘베사메 무쵸야’ 라고 했다는 겁니다. 당시 초대 미국대사 이름이 무쵸라서 ‘서양에는 그런 성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김:
저도 이 노래를 알고 있었는데요, 그런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이 노래 한번 들어보죠. 현인이 부릅니다. ‘베사메 무쵸'.
현인 ‘베사메 무쵸’
김:
해방 후 소련군이 북쪽에 진주하면서 북에서도 음악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러시아풍의 음악이 유행하게 된 거죠.
아코디언 연주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음악은 북쪽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음악세계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남쪽에도 널리 알려진 ‘카츄사의 노래’ 등이 그 당시 북에서 인기 있던 노래였다고 들었습니다.
오:
1950년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 -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이라고 말하죠, 해방 후 모처럼 불어 닥친 대중가요의 발전에도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일제식민 통치로 가뜩이나 멍들었던 우리 민족은 동족상잔의 참극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가요인들에게도 뼈저린 수난을 안겨주었는데, 미처 피난하지 못한 남의 가수 이인근, 이몽녀, 김홍렬, 강남춘, 이복분이 납북되었고 작곡가 김형래, 김해송이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 비참한 환경에서도 가족의 죽음과 이별, 생사를 넘나드는 피난살이 등을 주제로 한 가요가 작곡되었고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김:
1948년 북한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북한은 남북이 함께 부르던 유행가요를 점차 금지곡으로 단속하면서 소위 혁명가요나 김일성 찬양가요를 적극적으로 보급하게 되죠. 그러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에서는 모두가 군가나 군가풍의 전투적인 가요일색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남에서 유행하던 가요를 듣거나 부르다 발각되면 반 혁명분자로 문책 당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1999년, ‘계몽기 가요 선집’을 발간하면서 이런 노래들은 계몽기 가요라고 하면서 이 노래들을 해금해서 인민들이 부를 수 있게 했습니다.
오:
전쟁 통에 남한에서는 군가풍의 ‘전우야 잘 자라’가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과 전의 가 뒤범벅이 된 이 노래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감정을 한데 모으는 데 기여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엔 또 피난민들이 밀려들었던 부산이나 흥남 같은 항구도시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가 대표적인 노래인데요, 50년대 초반 남한의 선술집에서는 매일 밤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월남 실향민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박단마의 ‘슈사인 보이’,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신세영의 ’전선 야곡‘ 등이 한국 전쟁이 낳은 노래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김:
북한에서도 전쟁 시기에 많은 노래들이 나왔으나 대부분 조국애와 당을 위한 가요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전쟁가요 한 곡을 평양국립교향악단의 음악으로 들어보시죠. ‘내 고향의 정든집’.
‘내 고향의 정든 집’
오:
한국전쟁 직후에는 대부분의 유행가요가 피난살이의 고달픔, 가족 간 생이별의 아픔, 전쟁 통에 부모형제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노래하는 것 이었습니다. 한정우의 ‘꿈에 본 내 고향’ 앞서 말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박재홍의 ‘물레방아 도는 내력’,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이런 노래들이죠.
북에서는 전쟁 후 어떤 노래들이 유행했는지 궁금하군요. 이번에는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 들어보시죠.
현인 - ‘굳세어라 금순아’
김:
이 노래는 오늘 처음 들어보네요. 저만해도 전후에 태어난 세대라 이 시기의 나온 노래들을 사실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노래 가사를 들어보니, 그 시대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듣고 충분히 공감하셨을 법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가사 내용이 잘 들리셨는지 모르겠는데, 잘 들어보시면 전쟁 통에 헤어진 금순이를 찾아 내 소식을 전하는 그런 애잔한 내용입니다.
오:
1950년대 중반이후 남한에서는 맘보리듬이 대유행을 하게 됩니다. 맘보춤과 함께 김정구의 ‘코리안 맘보’를 비롯해서 한복남의 ‘맘보 타령’ 등이 유행을 탓지요. 미군의 주둔과 함께 춤바람이 불어 블루스도 크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또 라디오 연속극이 인기를 끌어 연속극 주제가 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청실홍실’, 영화주제가인 ‘유정 천리’ ‘꿈은 사라지고’,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이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에 힘입어 대 유행하게 된 노래들입니다.
김:
남한에서는 50년대 말까지 참으로 많은 유행가가 서민대중의 사랑을 받았군요. 그에 비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선전 선동 도구로써 유행가를 이용하고 규제했다고 합니다.
저도 어른들한테 전해들은 얘기입니다만... 이번에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는 ‘유정 천리’ 한번 들어볼까요.
하춘하,이미자 - ‘유정 천리’
오:
참으로 유행 가요는 일제 때부터 억눌리고 상처받은 우리의 민족정서를 달래주고 위안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아쉬운 것은 남북분단이 본격화된 40년대 후반부터 가요에서도 남북의 정서가 갈라서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혁명과 민족해방이라는 허울에 가로막혀 북녘의 동포들이 우리 가요를 더 발전시키고 좀 더 즐기지 못하게 된 현실이 정말 안타깝군요.
김:
정말 그렇습니다. 40,50년대 남북의 정서와 지금의 남북 정서는 가요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로 다릅니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사회에서 살다보니 만들어진 차이인데, 앞으로 이런 노래들을 함께 부르고 또 새로운 노래들을 공유한다면 이런 차이는 금새 좁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
오늘은 음악 산책 두 번째로 1940년대와 50년대의 우리 가요에 대해서 얘기 나누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1960년대의 남북 가요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자유아시아 방송, 진행에 김철웅 오중석 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