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음악 산책, 김철웅 이현주 입니다.
김철웅
: 서울의 거리 풍경 이번 주, 재밌습니다. 개나리, 목련 ,벚꽃은 활짝 피었는데, 길거리엔 장갑 장사, 목도리 장사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현주
: 월요일 저녁, 비 오면서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떨어졌는데요, 4월 중순에 영하 날씨가 웬일인가요? 어쨌든 저도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 입었는데요 … 정말 기온이 이상하긴 합니다. 덕분에 남쪽에는 감기가 유행입니다. 저도 코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목소리가 맹맹한데요 (웃음)
김철웅
: 어린이 감기 환자들이 많아서 소아과는 거의 전쟁터라고 합니다. 북쪽도 날씨가 비슷할텐데, 환절기 감기 조심하셔야 겠습니다. 오늘 음악 산책.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으로 시작합니다.
선곡1 –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이현주
: 철웅 씨 북쪽에서는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앞에 ‘공훈’이나 ‘인민’을 붙이는 경우가 있죠?
김철웅
: 그렇습니다. 국가나 사회에 특별한 공헌을 한 인사들에게 그런 칭호를 주는데, 이 칭호를 받으면 굉장한 영광이고 또 일생이 보장되기도 합니다.
이현주
: 남쪽에서는 국가에서 이런 칭호를 직접 주는 경우는 없잖아요? 대신에 ‘국민 가수’, ‘국민배우’ 라는 것이 있죠? 그러나 이것도 누가 오늘부터 어떤 배우나 가수를 이렇게 부르자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나 가수에 자연스럽게 이런 칭호가 따라 가는 것이죠.
김철웅
: 바로 방금 들으신 ‘섬마을 선생님’ 부른 이미자 같이 오랫 시간 동안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은 가수를 국민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조용필이나 인순이 이런 가수들이 국민 가수라고 하더군요. 배우는 안성기, 최불암 씨 정도를 국민 배우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현주
: 네, 이런 국민 가수, 국민 배우들은 남쪽 사람뿐아니라 우리 청취자들도 대부분 알고 계실만한 분들이 많죠. 오늘 이렇게 국민 가수, 국민 배우 얘기로 시작한 이유는 오늘 ‘음악 산책’ 시간에 남쪽의 ‘국민 작곡가’ 라고 불릴 만한 분을 소개하고 싶어서 입니다.
김철웅
: 바로 3월 14일 타계한 작곡가 박춘석 씹니다. 이 분이 바로 방금 들으신 섬마을 선생님을 만들었고 이미자가 부른 대부분의 노래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 사람 이름은 몰라도 아마 우리 청취자들도 이 분 노래 한두곡 쯤을 아실 텐데요, 오늘 이 시간, 작곡가 박춘석의 노래들로 채워봅니다.
이현주
: 노래 한곡 듣고 얘기 이어가죠. 김상희가 부릅니다. 황혼의 엘레지.
선곡2 – 김상희 황혼의 엘레지
김철웅
: 박춘석 씨는 1930년생 올해 80세입니다. 어릴 때부터 악기를 아주 잘 다루는 신동이었다고 하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 선생의 소개로 악단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자신의 이름을 건 재즈 악단을 만들어 미 8군 무대에서도 섰습니다. 바로 이 노래 황혼의 엘레지가 피아노 연주가 박춘석이 처음 작곡가로 이름을 알린 노랩니다.
이현주
: 이 노래를 발표한 것이 1954년인데요, 이후 아리랑 목동, 비 내리는 호남선 같은 노래를 만들어 인기 작곡가가 됩니다. 그러다가 1964년, 자신의 작곡가 인생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가수 이미자를 만납니다. 이렇게 들 말씀하시더군요 – “ 박춘석의 인기곡 4분의 1을 이미자가 불렀고 이미자의 인기곡 3분의 1을 박춘석이 만들었다”. 국민 가수 이미자의 목소리를 통해 작곡가 박춘석의 노래를 60-70년대 남쪽 가요계를 평정합니다.
김철웅
: 노래 한곡 들어볼까요. 이미자가 부릅니다. 기러기 아빠
선곡3 – 이미자 기러기 아빠
이현주
: 그렇지만 박춘석은 이미자 노래 같은 트로트, 전통 가요풍의 노래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가수 패티 김에게 준 노래들은 상당히 느낌이 틀립니다.
김철웅
: 박춘석의 시작이 재즈 피아노 연주라서 그런 지 몰라도 패티김이 부른 박춘석 노래를 상당히 서구적인 감성도 느껴집니다. 저도 이 노래 참 좋아하는데, 청취자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패티김이 부릅니다.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선곡 4 -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이현주
: 사실 작곡가 박춘석 씨는 철웅 씨나 제 세대가 친숙한 작곡가가 아니죠?
김철웅
: 저야 북쪽 출신이니 잘 모르지만, 일단 50년대 중반부터 60,70년대에 활동한 분이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현주
: 저는 할머니가 즐겨 보시는 텔리비젼 프로그램에서 고수 머리에 굵은 뿔테 안경을 쓴 이 분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긴 한데요, 아무래도 저 보다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또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게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박춘석의 사망 기사를 보는 반응도 저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친구를 잃은 듯이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김철웅
: 그 분들의 젊은 시절, 그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해온 노래라 더 특별할 것 같습니다.
이현주
: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며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든 작곡가이기 때문에 박춘석씨의 부고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철웅
: 직장에서 또 집에서, 밖에서 친구들과 술상 앞에서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이 머리속에 잘 그려지는데요. 우리 청취자들도 고단한 생활에서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한곡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현주
: 한 신문에 실린 논평을 그래도 옮겨 봅니다. 60-80년대 국민 대부분이 힘들었던 개발 시대 요즘 흔한 CD도 MP3 도 없이 사람들은 숙소, 사무실, 공장에서 라디오와 레코드 판으로 노래를 들었다. 이렇게 함께한 노래를 해준 가수와 작곡가 없었다면 그 세월이 헤쳐 나오지 못했을 지 모른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함께 해준 노래. 그리고 이 노래를 만든 작곡가. 박춘석의 노래를 징검 다리 삼아 우리는 개발과 시련을 강을 건너 왔다.
김철웅
: 좋은 음악이란 바로 이런 노래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그래서 박춘석은 국민 작곡가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습니다. 우리 북쪽의 인민 배우, 공훈 배우들도 인민을 위한 , 어떤 개인이나 체제의 보답이 아닌, 인민을 위한 작곡가, 가수, 배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현주
: 박춘석 씨는 음악과 결혼했다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데 생전 모두 2700곡을 만들었습니다. 1954년 부터 1994년 뇌졸증으로 쓰러질 때까지 한달 평균 6곡을 만든 셈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고인의 노래는 많은 남쪽 국민들의 가슴 속에 또 이 노래를 알고 있는 우리 북쪽 청취자들의 마음 속에도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김철웅
: 마지막 곡으로 박춘석의 이 길을 간다. 들으면서 저희는 이만 물어갑니다.
선곡 4 박춘석 이 길을 간다
지금까지 진행에 김철웅,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다음 시간까지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