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과 함께 북한의 실상을 파헤쳐보는 '인사이드 엔케이(Inside NK)'는 28회 주인공은 2000년 12월 탈북해 현재 통일•안보 교육 전문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혁 씨입니다.
가죽처럼 끈질긴 삶
김혁 씨의 이름 혁(革)은 가죽이란 뜻이다. 친척분이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가죽처럼 오래 살라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다. 김혁 씨는 친어머니는 4살 때, 아버지는 13살 때 여의고 7살 때부터 꽃제비 생활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모르고 계모와 크다가 어느 날 두 살 위 형이 보여준 친엄마의 사진을 보고 형과 출가를 결심했다. 평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어 평양을 가려고 했으나 검열 때문에 실패했다. 얘기로만 듣던 수영장, 놀이동산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90년대 꽃제비의 생활은 험난했다. 70년대 꽃제비 관리 차원에서 만들어진 꽃제비 수용소인 '계모학원'에 들어간 김혁 씨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꽃제비들을 수없이 많이 봤다. 학원에서는 소위 대용식량이라는 옥수수대를 갈아서 밀가루를 약간 섞어 만든 죽을 줬는데 이걸 먹고 꽃제비들이 영양실조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김혁 씨는 낮에는 학원에서 나와 식량을 구걸해서 겨우 연명을 했다. 그런 '기술'이 없었던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청진역 부근에서는 시체를 소달구지에 실어서 병원으로 이송한 다음 50-60구씩 땅을 파서 몰매장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질서를 흔드는 꽃제비
7살부터 꽃제비 생활을 했던 김혁 씨는 꽃제비가 한편으로는 북한 정권의 관리 능력을 약화시키는 면도 있다고 얘기한다. 1940년대부터 해방 후, 50-60대 한국전쟁, 70년대 탄압과 강제 이주, 90년대는 경제 문제로 꽃제비들은 항상 존재해왔다. 꽃제비들은 빌어먹기 어려우니까 탈취를 일삼았고 더 힘들어지니까 조직화되었다고 한다.
90년대 중반 경제위기 후 주민들이 주체사상 교육에 참여를 안 하니까 사상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북한 정권과의 갈등이 생기자 시장을 풀어주는 대신 관리세를 징수했는데 꽃제비들 때문에 이 관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탈취를 일삼는 꽃제비 조직에게 상인들이 보호의 대가로 돈을 주면서 통제력이 꽃제비한테 넘어간 것이다.
한편, 96년부터 꽃제비를 비롯한 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부각되자 북한 정권은 97년 '9.27상무조'를 조직하고 구호소와 꽃제비 청년분조를 만들어 꽃제비들을 농장에 수용시켰다. 98년에는 어린이를 혁명가로 만들기 위해 교양을 시키는 '모성영웅' 대회를 개최해 모성영웅들에게 꽃제비 입양을 권유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과 주민은 다르다
김혁 씨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강조하는 것은 북한 정권과 주민들을 같이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당원이라고 해도 '권력이 있는' 소수의 당원만 독재정권의 혜택이 있을 뿐 대다수의 주민들은 북한 정권의 탄압과 인권 유린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98년 10월 국경을 넘다가 보위부에 잡힌 김혁 씨는 안전부(경찰서)에서 3년형을 선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었다. 97년에 국제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가 부각되자 98년부터 법 적용이 완화되어 다행히 경제범으로 취급된 것이다. 더 일찍 잡혔더라면 사형을 당하거나 또는 정치범수용소행이 됐었을 것이다.
김혁 씨가 강의를 할 때 가장 힘들 때는 통일을 왜 해야 하는 지를 설명할 때라고 한다. 학생들이 북한 사회에 대한 의심이 많고 북한 사회를 너무 단일적으로 보기 때문에 정권과 주민을 같이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강의를 통해서 북한 사회를 잘 이해하고 관점을 바꿀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