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찾아올 손님이 딱히 없는 탈북자인 나여서 처음 듣는 나의 집 벨 소리가 더욱 반가웠다. 문을 여니 세 명의 낯선 여인들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서있었다. 나는 곧 실망했다. 집을 잘 못 찾아온 사람들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인들 중 한 명이 상냥한 목소리로 집주인이냐고 물었다. "네"라고 말하는 나보다 더 확신에 찬 얼굴로 여인들은 집에 들어가서 좀 이야기해도 되냐고 다시 물었다. 서울에 거주하고 난 뒤 집에 찾아온 첫 손님이라 안 된다고 거절하기 싫었다.
여인들은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나를 빙 둘러 앉더니 다짜고짜로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 교회라는 말도 이상했지만 초면의 나에게 주말이면 주로 어디 가는지, 잘 생겼다고 칭찬하는 여인들의 수다가 더 수상해 보였다. 알고 보니 그 여인들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 사는 기독교 교인들이었다.
같은 아파트 주민이어서 부담 없이 찾아 올라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남한에선 어떤 것이 과연 부담인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나를 교회로 이끄는 그녀들의 성의는 참으로 지극정성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녀들이 갖고 온 떡 한 꾸러미에 빚져 어쩔 수 없이 교회로 가게 됐다.
교회는 겉 보기에도 굉장히 큰 건물이었다. 예배만 하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혁명역사 학습만 하는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혁명연구실 생각이 언 듯 스쳤다. 정문으로 들어설 때였다. 키가 크고 날씬한 20대 중반의 아가씨가 나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거침없이 "사랑합니다."고 말했다. 무심결에 그 앞을 지나치려던 나는 순간 걸음을 뚝 멈추었다. 나를 사랑한다니! 초면의 나에게 사랑한다니? 나의 굳어있는 표정 앞에서 아가씨는 더욱 자신 있는 목소리로 "사랑합니다."고 다시 말했다. 나는 금시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아무리 개방적인 남한사회이고,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든다고 해도 어떻게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여자가 대놓고 사랑한다고 먼저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어리둥절했을 때였다. 교회 현관으로 들어서는 또 다른 노인 한 분을 향해 아가씨가 나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랑합니다." 분명 그 소리였고, 그래서 배신감도 느껴졌다. 그 뒤로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북한에선 부부 사이에도 어색해서 잘 쓰지 않는 "사랑합니다."인데 남한에선 이렇게 쉬운 말이었는가 싶었다.
둘러보니 교인들은 서로 손을 잡으면서까지 인사 말 대신 "사랑합니다."는 말을 나누었다. 그 모두의 단어를 이성의 단어로 심각하게 오해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당장 집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예배 실이라는 넓은 공간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꽉 차고 그 앞의 연단에 선 목사의 선창을 따라 "사랑합니다."는 거대한 화답이 울릴 때에는 저절로 목이 움츠러졌다. 기도를 위해 모두가 머리를 숙였을 때에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유독 나만 목을 길게 빼 들고 사방을 둘러보고 있어서였다.
그 상황 앞에서 나는 왜 이 사람들은 머리를 깊이 숙일까? 사람이 고개를 숙이면 자존심도 숙여지는 것인데 왜 자신을 낮추는 것일까? 등 등 끝없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이 많은 사람들 속에는 학식 있는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있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목사가 선창하는 기도 내용을 귀담아 들어보았다. 또한 목사의 목청을 따라 합창하는 교인들의 기도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나는 그때에야 알았다. 예수님 앞에선 모두가 평민이고 그 자체가 평등이라는 것을 말이다. 김일성은 자기에 대한 충성만을 강요하는데 성령은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는 귀한 가르침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처음 본 아가씨도 나에게 스스럼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왜 남한에서 교회가 번창하는지 그 이유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목사는 탈북자인 나를 특별히 불러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목사는 예수님 얼굴을 처음 봤을 텐데 석가모니랑 뭐가 틀린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헤어스타일이 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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