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한사회의 풍요를 실감했던 것은 백화점에 물건이 많고, 도로에 차가 많은 것을 보아서가 아니었다. 가끔 거리를 다닐 때면 기업들이 자사 홍보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는 공짜 상품들을 받았을 때였다. 배급사회인 북한에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무료혜택이다. 년 중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주는 공짜가 있긴 하지만 그럴 때는 마치 세상을 다 준 듯 감상문을 강요하고, 결의모임까지 조직하여 집체적 광기의 충성을 받아낸다.
내가 조선중앙방송위원회 다닐 때였다. 그때가 고난의 행군시기였는데 김정일이 어느 양어장에서 바친 숭어 2000마리를 조선중앙방송위원회 기자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산하에는 TV총국, 라디오총국, 방송문예총국 3개가 있는데 그 인원을 모두 합치면 2000명이었다. 일인 당 한 마리씩 차례지는 숭어였지만 우리는 집체 결의모임에까지 동원되어 주석 단에서 이름을 거명한 순서대로 무대에 올라가 그 한 마리를 흔들며 목청껏 만세를 불러야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부서 사람들과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갔다. 장군님의 은정 깊은 생물을 한 마리씩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나와 동료들은 남들처럼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옆에 선 사람이 격정을 강조하여 숭어를 너무 세게 흔들어댄 바람에 꼬리 끝에서 튕겨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통에 2000명의 직원에게 일일이 물고기선물을 수여하던 초급당비서 얼굴에 고기비늘 몇 개가 뿌려져 나붙고 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세수한 것처럼 생선 물에 범벅이 된 불쌍한 초급당비서의 얼굴이어서 나는 그만 못 참고 키득거렸다.
나의 죄는 그 뒤에 더 커졌다. 급한 약속에 깜빡 잊고 생선을 사무실에 두고 퇴근했었는데 일이 안 되려니 다음 날이 일요일이었다. 월요일에 나와보니 휴일 내내 썩은 숭어 냄새가 온 복도를 진동했다. 온 가족과 함께 장군님 선물을 맛있게 먹으며 충성의 눈물로 일요일을 즐겼다는 식의 감상문을 써서 바쳐야 하는데 냄새라니! 썩혔다니! 버렸다니! 하는 비판들이 나에게 집중됐다. 나는 결국 1개월 동안 조선중앙방송위원회 부업농장으로 혁명화 나가 노동의 고된 맛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공짜의 추억을 안고 있는 나여서 기업 홍보 아르바이트 생들이 달콤한 콜라를 그냥 쥐어주고도 오히려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모습들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백화점 식품매장에 갔을 때는 더 놀랐다. 물건을 팔아야 될 여인들이 간단한 가스레인지를 붙들고 서서 요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먹어 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나는 뒷걸음치며 긴장했다. 먹고 나면 분명 돈을 달라고 할 것은 뻔해서였다. 사람을 속이는데 탁월한 자본주의 상술이라고까지 단정해버렸다.
그런데 내 주변 손님들의 반응은 달랐다. 주는 대로 먹어보더니 잘 먹었다는 인사도 없이 맛을 음미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매장의 여인 또한 돈 달라고 쫓아가는 일이 절대 없었다. 다만 맛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이 있을 경우 또 다른 성의로 재료 설명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족했다. 나는 그때야 식품을 팔기 위한 맛보기 서비스라는 것을 알았고, 그 주변에서 아주 오랜 시간 서성이며 얻은 노력의 대가로 '시식'이란 용어도 처음 알았다.
나는 무척 감동 받았다. 먼저 먹어보라니, 북한에선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아마 북한 같았으면 시식 줄이 배급 줄 만큼이나 길게 늘어지다 못해 새치기 사람들 때문에 싸움이라도 났을 것이다. 아니 감히 김일성, 김정일 생일선물보다 맛있고 인기 있는 공짜 돌림이라면 그 자체가 엄중한 위반행위로 문제가 됐을 것이다. 백화점 안의 온 식품 매장을 골고루 돌아다니며 탐식한 시식에 배가 차고 나니 그제야 너무 염치 없었던 자신의 인격이 부끄러워졌다.
뭐라도 사야지 보답이 될 것 같아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넣은 것이 다 계산하고 보니 20만원이 훌쩍 넘었다. 결국 시식이 공짜가 아니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나는 무척이나 즐거웠고 심지어는 뿌듯했다. 위로 향하는 충성경쟁이 아니라 아래로 향하는 기업들의 헌신경쟁 구조 속에서 당당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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