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기업인을 만나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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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국 기업인들로 구성된 모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최근 북한의 실상에 대해 강연을 해달라는 청탁이었다. 아침 7시에 시작하는 조찬모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돈 많은 기업인들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유의 특혜가 클 것인데 이른 아침부터 모인다는 말이 잘 믿겨지질 않아서였다. 그런데 정작 당일 7시 전에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어느 유명 그룹의 회장도 있었다. 한 시간 전에 미리 와서 기다렸다는 분 도 있었다. 그만큼 한반도의 분단 특성상 북한문제에 대한 관심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북한 통전부의 대남전략과 북한의 실상에 대해 한 시간 가량 강연을 했다. 끝으로 자유문답시간이 이어지면서 모임은 애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30분 가량 더 길어졌다.

사실 그 날의 기회는 향후 내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가끔 북한 사안에 따라 조언을 구하는 분 도 계셨고, 아예 따로 만나 대북사업 현황과 전망을 직접 들으려는 분도 계셨다. 때로는 식사나 술자리와 같은 사석에 불러주기도 했다. 혈육도 없이 남한에서 홀로 살아가는 나의 처지를 헤아려 보듬어주고 고무격려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발전하여 기꺼이 양아버지가 되어주겠다는 분도 있었다. 그 양아버지 덕에 학연, 지연도 없는 맨 주먹의 탈북자 신분이었지만 도저히 만나기 힘든 사람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고 사회를 보는 눈도 조금 뜰 수가 있었다. 북한이 선전하는 것처럼 남한의 기업인들은 착취자도 아니고, 돈의 노예가 아니었다. 내가 만났던 기업인들 중에는 빈농 출신으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이들도 꽤 됐다.

어떤 분은 빈 터에서 출발하여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고, 지금은 일 년에 200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큰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사회공헌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정작 버튼 식 옛날 휴대폰에 싸구려 손목시계를 차고 옷도 검소하게 입고 다녔다. 자신에겐 인색하고 남에겐 후한 외유내강이었다. 그들의 삶은 그대로 남한 사회가 걸어온 인내와 성공의 역사 같았다.

특히 남한의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분단의 현 주소를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북한의 어르신들은 "우리가 옛날에 잘 살았는데..."라고 가슴을 치는 반면 남한의 어르신들은 "우리는 옛날에 못 살았는데..."라고 웃으며 회고하셨다. 북한은 그 옛날에서 더 퇴보한 반면 남한은 승승장구해 왔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몇 십 년의 다른 정치가 이렇게 남북을 아득하게 갈라놓았다는 생각에 북한을 저 지경으로 만든 김씨 일가에 대한 가증스러움이 더 커졌다.

사실 나에게 너무 과분하고 고마운 그 인연들은 단 한 분으로부터 시작됐다. 바로 내가 남한사회에 첫 정착의 짐을 풀고 나서 처음으로 만났던 모 언론사의 대표였다. 그 분에 대해서는 지난 방송에서도 언급했었다. 그 분은 초면에 돈을 받기 싫다며 내가 거절한 200만원 대신 그 어떤 가치로도 계산할 수 없는 귀중한 분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나를 경제인 조찬모임에서 강연하도록 추천해주신 것도 그 분이시었다. 삶의 조언만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그 분은 자상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찮은 한 점의 작은 씨앗에서 잎이 돋고 가지가 자라고 열매가 달리 듯 남한에서의 대인관계는 그렇듯 작은 충심과 노력이 모여 풍성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귀중한 삶의 체험이었다. 북한의 충성심은 희생을 장려하다 못해 자폭까지 강요하는데 남한에서는 인간적인 진심과 신뢰의 작은 정성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착한 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