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신문 뉴포커스를 발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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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책연구소를 나온 시점은 2010년 12월이다. 내가 사퇴한 것이 아니라 사실 해임됐다. 이유는 연구소 소장 허락 없이 자율적으로 TV토론에 나갔다는 것이다. 나의 해임사실이 알려지자 보수단체들은 중앙일간지 신문에 소장을 해임시키라는 광고를 실었다. 급기야 소장은 나를 불러 견책으로 징계 수위를 낮춰주겠으니 더는 여론화 시키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런 고무줄 징계 자체가 부당한 것이어서 나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결국 나는 2013년 1월부터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는 법에 고소해보라고 야단들을 쳤지만 나는 다른 정당성을 찾고 싶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도 달라지는 국책연구기관의 비겁한 월급쟁이로 연명하느니 차라리 자유로운 활동으로 나의 존재와 능력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홀로서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월급이 내 생애에 그렇듯 큰 몫을 차지한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됐다. 아파트 대출금도 만만치 않아서 매달 반복되는 은행의 독촉 또한 목을 죄는 올가미 같았다. 월세를 줄여야 했고 차도 팔아야 했다. 배운 것은 글 쓰기 밖에 없어 여러 언론사들에 이력서도 보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말뿐이었다.

역시나 가장 힘들 때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고마운 인연들이었다. 양아버지를 비롯해서 그 동안 나를 아껴주었던 많은 분 들이 생활비로 쓰라며 큰 돈을 내주시었다. 그 돈을 받을 때마다 작든 크든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고 이어지는 인간세상에서 필연의 행복은 있어도 우연의 불행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감사했던 사람은 여자친구였다. 해임통지서를 받은 날 오히려 새 삶을 축하한다는 말로 위로해준 그녀였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여자친구에게 탈북자 신문을 발행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던 나도 이렇게 힘든데 오자마자 기초생활수급으로 살아야 하는 다른 탈북자들은 오죽이나 힘들겠는가, 약자의 목소리를 모으고 또 대변하고 싶다. 나뿐 만이 아니라 비슷한 시점에 하나 원 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탈북자 7명도 아무 이유 없이 해고당했는데 그 하소연을 호소할 인터넷 신문이라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여자친구는 흔쾌히 5천만원을 내놓았다. 나는 그때부터 탈북자신문의 이름을 일주일 동안 고민했다.

지금은 비록 2만 5천명이지만 통일된 이후 이천만 북한 인민을 대변하자면 어떤 이름이 가장 적합하겠는지 매일 흥분된 심정으로 짓고 또 수정했다. 남북통일 시점에 북한 주민들에게 절실한 것은 진실이면서도 새로운 눈과 귀를 가지도록 주도하는 것이 언론으로서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나는 세계 속의 북한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영어로 새로운 초점, '뉴포커스'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뉴포커스' 였지만 정작 운영하자고 보니 어려운 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기자들의 경력도 부족했지만 운영자금도 턱없이 모자랐다. 무엇보다 나에게 큰 고민은 어떻게 탈북자신문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북한 소식과 탈북사회 소식으로 크게 나누었지만 북한도 폐쇄적이고 탈북사회 소식도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기사를 거짓말로 쓰고 싶지 않았다. 사비로 만든 애착도 컸지만 무엇보다 신문 발행자로서의 자존심과 명예심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또한 대북매체로서의 생존을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꾸며대는 일부 경향들을 늘 경멸했던 터라 남보다 '빨리'가 아니라 신뢰로 '천천히' 가고 싶었다. 하여 북한 일상을 남한과 비교해서 쓰는 방식을 추구했고, 그런 생명력으로 점차 뉴포커스 만의 역할과 지위를 확대할 수 있었다. 나중엔 북한 정권이 공개 협박까지 하면서 뉴포커스 홍보를 자처하는 통에 해외와 북한 내부에도 통신원이 확보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