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기가 인천공항에 내린 것은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승무원들의 정중한 1호인사를 가슴에 담고 비행기 문밖을 나설 때였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얼마나 간절했던 자유의 땅이란 말인가? 얼마나 꿈 속에서도 갈망했던 이 순간이었던가? 자유의 이 첫 걸음을 과연 오른발부터 짚을 것인지 아니면 왼발부터 짚을 것인지 잠시 망설여졌다.
왜 그렇지 않으랴, 평양에선 오직 당이 그어진 길을 따라 걸어야만 했던 나의 두발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것을 거역하고 탈출의 두발을 두만강 얼음장 위에 내 짚었을 때는 그때부터 매 순간 목숨에 쫓겨야만 하지 않았던가,
다른 여행객들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동안 인천공항에는 나의 가슴을 진동하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항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울리는 한국말이었다. 그 소리는 내 귀에 분명 잘 들리는 언어, 내가 한민족임을 새삼스럽게 깨우쳐주는 울림만이 아니었다. 같은 한국말이지만 전혀 다르게 들리는 자유의 언어였다.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가 소원의 성취를 확인시켜주는 나의 언어, 비로소 깨달은 국어의 힘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전류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라면 모두 수령에 대한 충성심만을 고취하는 북한 방송과 달리 나까지도 포함되는 여행객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여서 가슴이 더 짠했다. 그날 내가 난생처음 본 자유의 서울은 자정이 가까운 밤인데도 환했다. 황색 불빛의 가로등이 빠르게 뒤로 지나칠 때마다 여기까지 오는데 겪어야 했던 긴장과 두려움, 절망과 소원들이 과거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대신 마주 오는 무수한 차들의 불빛에서 내 홀로 극복해야 할 자유의 대로와 그 속의 일상들을 상상하게 했다.
그날 밤 내가 짐을 푼 곳은 서울 도심에 자리 잡은 "대성공사"라는 곳이었다. 정문에서 나를 맞을 때 자기들을 대성공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서울에 입국하면 무조건 걸쳐야 하는 곳이라고 설명해줬다. 과연 거기엔 탈북자들이 수 백 명이나 됐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렇게 수 백 명이 대성공사를 거쳐 "하나원"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하나원"은 탈북자들에게 3달 동안 남한 사회적응을 위한 최소의 교육을 주는 곳이라고 한다. 거기를 졸업하면 일인 당 3만7천달라의 정착금도 준다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자유의 국민으로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런 큰 돈까지 주다니! 그러나 나는 남들과 같이 "하나원"이 아니라 "안가"로 옮겨졌다.
'안가'란 안전가옥이란 뜻인데 내가 당 통전 부에서 근무했던 이유로 특별히 국정원 에서 조사하려고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국정원이란 말을 듣는 순간 북한 영화에서 봤던 안기부 남산지하실의 고문장면들이 떠올랐다. 물고문, 전기고문, 심지어는 병신까지 될 수 있다는 상상에 갑자기 사지 곳곳이 쑤시고 아팠다. 겁에 질려서인지 이름도 모르는 깊은 산 속으로 올라가는 도로도 미로 같았다, 승용차가 도착한 곳 또한 휴전선에서나 볼법한 전기철조망이 무려 두 겹으로 둘러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건물은 지하가 아닌 김정일의 별장처럼 매우 호화스럽게 잘 꾸며진 곳이었다. 산 정상 같은데 건물 앞에는 제법 작은 인공연못도 있고, 대문도 리모컨으로 열리는 현대식이었다. 나에겐 마치도 회유와 고문의 "안가"처럼 보였다.
첫날 밤을 불안의 뜬 눈으로 보내고 난 다음날이었다. 아침 일찍 휜 위생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독감 예방주사를 놔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다시 북한 영화를 상상하며 거칠게 항의까지 했다. 약물주사도 고문의 한 방법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북한 정권이 세뇌시킨 남조선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로 인한 나의 경직은 이렇듯 한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 나의 의문은 커졌다.
왜 나를 때릴지 않을까? 왜 이 사람들은 바보들처럼 무한정 착하게 기다려주기만 할까? 나도 사람이고, 그래서 인권이 철저히 존중된다는 것을 국정원 직원들은 알고 있었는데 그때는 나만 몰랐던 것이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