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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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가에 머문 지 8개월째가 됐다. 내가 무척이나 지루해하자 함께 교대로 숙식하던 직원 중 한 사람이 귓속말로 말했다. "여기서 길게 있을 수록 훗날 좋은 일로 돌아와요." "뭔 좋은 일인데요?" "여기서 지체됐던 시간만큼 우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고, 또 그 가치들이 정착 지원금으로 계산될 거니깐요." 나는 그 말 뜻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 할 기분도 아니었다. 오직 안가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이른 시간이었다. 내 방으로 전화가 왔다. 오후에 안가를 나가게 될 것이니 짐을 싸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전화 통화가 끝나기 바쁘게 10분 만에 내 물건들을 모두 챙겼다.

그 트렁크를 아예 현관문 앞에 세워두기까지 했다. 드디어 남한 시민이 되는가?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내 삶이 시작되는 것인가? 짬만 나면 즐겨 보던 TV도 꺼놓은 채 나는 안가 정원을 쉴새 없이 거닐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국정원 직원들이 도착했다. 함께 지낸 8개월 중 제일 반가운 순간이었고 얼굴들이었다. 과장은 달려서 마중 나온 나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선생 주민등록증이요, 한국 국민이라는 증서!" 그 말 앞에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한국 국민! 내가 한국의 국민이라니, 북한에선 인민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았지만 스스로 단 한 번이라도 북한의 인민이라는 그 인민성에 대한 의식과 자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알고 있던 나란 존재는 오로지 김 씨 일가에게 효도해야 하고, 당에 복종해야 하는 수령의 아들, 당의 전사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그 어느 인민에게도 국가와 나, 이런 평등의 관계는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았다. 충성이 생존이고 반역은 곧 죽음이라는 정권의 철저한 강요에 의해 전체주의 운명으로 꾸며지고 조작되는 인민이었다. 하기에 나의 탈 북은 체제의 탈출만이 아니었다.

그 인민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개인으로의 복원이었다. 그 개인의 몸부림과 염원이 자유남한과 만나 비로소 국민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나는 내 얼굴사진이 붙어있는 주민등록증에서 국민의 시작이 어떤 것인가를 또 한 번 크게 실감하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주민번호 숫자가 나의 생년월일 숫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 받은 평양시민증과 당원증에도 번호가 있었지만 그것은 정녕 내 번호가 아니었다.

그 번호들은 오로지 정권만이 셀 수 있었던 노예의 번호였을 뿐, 한국 주민등록증처럼 내가 태어난 날, 나의 존재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그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 주민등록증을 오래 동안 들여다 보고 만져보는 나에게 국정원 과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여기 있었을 때가 먹고 살 걱정이 없었지 밖에 나가면 그때부터는 무엇이나 다 혼자 결심으로 해야 되요, 자유민주주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고 성공한다는 것이 쉽지 않소,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부탁은 정착 잘하시고 꼭 성공하세요."

국정원 과장은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는 망망대해 같은 남한에서 이제부터 경쟁이라는 파도를 극복해야만 하는 나의 앞길이 염려스러운지 다른 때와 달리 길게 말했다. 내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 트렁크를 직접 들어 차에 실어주기도 했다. 차가 출발 하여 아득한 점으로 멀어질 때까지 국정원 직원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들에서 나는 8개월 동안 함께 지낸 그 시간들에 대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진심이 산을 내려오는 포장도로가 되어 기어이 따라서는 것 같기도 했다. "서울시내로 들어서는 고속도로입니다." 안내자의 말에 나는 등을 돌려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4차선 고속도로가 내 눈 앞에 넓게 펼쳐졌다. 그렇다. 이제부터 나의 삶은 이 고속도로처럼 순탄한 평평대로도, 직선도 아닐 것이다. 구부러진 길도 있을 것이고, 꽉 막혀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체해선 안 된다. 이 남한에 늦게 왔으니 대신 빨리 가야 한다. 남보다 빨리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