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 그 말 앞에서도 무덤덤했던 나

0:00 / 0:00

취직, 그 말 앞에서도 무덤덤했던 나였다. 12월 17일에 안가에서 나와 생활한지 10일 째 되던 날이었다. 안가에서 나와 8개월 동안 함께 숙식하며 조사했던 국정원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에 찾아 뵙겠으니 집에 꼼짝 말고 있으라는 것이다. 좋은 소식을 갖고 가니 기대하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오후 6시쯤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다른 한 분은 과장이었다. 저녁 식사 겸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고기를 주문하고 컵에 맥주를 채우고 난 뒤였다. 불쑥 과장이 축하한다는 말부터 했다. 축하 받을 내용이 뭔지 알아 맞춰보라고 뜸을 들이기도 했다. 내가 이것저것 헛짚는 것을 듣다 못해 과장이 제 김에 고백하고 말았다.

"당신 참 운이 좋아요, 한국에 오자마자 남들이 못 들어가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됐으니 말이요," "어떤 직장이요?"

내가 담담하게 묻자 의외라는 듯 과장은 더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앉았다.

"연구소에 배치 받았어요, 그것도 국책연구소에, 여기 남한 출신들도 대학원 졸업하고 아무리 박사라고 해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국책연구소예요."

나는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타는 고기를 뒤집는데 더 집중했다.

"내가 거기서 할 일이 뭔데요?"

정말이냐고, 그게 사실이냐고 두 번, 아니 세 번이라도 확인해야 정상인데 그냥 무덤덤한 내 얼굴을 보고 국정원 과장과 직원은 서로 마주보았다.

"거기서 할 일? 아니 이 사람아 당신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고 알려주는데 반응이 왜 그 모양이야?"

나는 그제야 애써 웃는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직장? 나 한데 물어도 안 보고 막 그렇게 강제로 취직시켜요? 각자 자기 취미가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는데 그 연구소 가서 도대체 내가 뭘 연구해요?"

"뭐 강제로? 자기 취미?"

과장은 고기를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어이가 없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솔직히 그때의 나는 취직이란 말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얼마나 행복한 단어라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냥 북한에서의 경험대로 직장이라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위에서 결정하는 것이고, 한번 조직에 소속되면 내규에 복종해야만 하는 구속의 개념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조직생활에 묶이기 전에 이왕 자본주의 나라에 온 이상 3달이나 6개월만이라도 개인의 삶을 실컷 살아보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월급? 그 돈이란 것이 뭐가 중요한가? 북한에서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았던 것이 돈을 먹고 자란 성장이었나? 갖고 싶었던 꿈의 자유를 얻었고, 대한민국 선진국민의 주민등록증까지 얻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성취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배짱과 자신감으로만 충만했던 나였던 것이다.

더구나 직장 없이 방황하면서 월급이 그리운 심리적 공황을 체험할 새도 없이 한국 사회에 정착한지 보름 만에 듣는 취직소식이라 나에겐 당연한 일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는 아쉬움, 그 이상의 감정 밖에 느끼지 못했다.

언제부터 출근해야 하는가 물으니 당장 며칠 후인 새해 1월 2일부터라고 했다. 12월 27일부터 날짜를 계산해 보니 앞으로 남은 자유의 시간이 고작 5일 밖에 남지 않아 오히려 그 조급함에 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국정원 과장과 직원은 더 말해야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식으로 쓴 입을 다시기만 했다.

북한에서 나름 엘리트 교육과 코스를 밟은 나였지만 자본주의 국민으로서는 그렇듯 뜻밖의 엄청난 행운 앞에서도 무감각했던 눈 뜬 소경이고 귀머거리였다.

그 이유는 나 개인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이 실종됐기 때문이었다. 즉 개인의 삶이 아니라 오직 충성으로 바치는 전체주의 의식 밖에 갖고 있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타산이나 목표, 또 그 과정에서 얻는 결과들이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는 개인적 성취감과 희열의 세계를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속이냐 해방이냐, 오직 그 이분법의 심리 밖에 가질 줄 몰랐던 단순 불행한 탈북자의 첫 걸음마였던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