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3일이다. 그날은 나의 첫 출근 날이기도 했다. 나의 신변보호를 맡은 담당 형사의 차를 타고 아침 9시에 국책연구소로 갔다. 형사는 가는 길에서도 대단한 직장에 취직한 내가 부럽다느니, 이런 우대가 쉽지 않다느니, 듣기에도 거북한 찬사들을 쏟아냈다. 연구소 정문은 내가 근무했던 북한의 통전 부 101연락소와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육중한 철문이 있고, 그 옆의 작은 건물은 경비원 방과 대기실로 나누어져 있었다.
경비원은 내 주민등록증을 받고 '행정기획실'이라는 부서에 확인전화를 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행정 실 직원이 마중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간 곳은 연구소 청사 3층에 있는 소장 방이었다. 양복과 안경이 잘 어울리는 6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북한 같았으면 당비서 방에 먼저 들린다. 당비서로부터 당의 신임에 보답하자는 따위의 일장연설을 듣고 신분증도 당 증 수여 받듯이 경건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런데 남한의 직장은 그런 틀이 전혀 없었다.
소장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앉으라더니 비서에게 차를 주문하고 한담을 늘여놓았다. 혼자 생활하는데 뭐가 불편한지, 음식은 뭘 좋아하는지, 운동을 하는지 등 나의 취직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뿐이었다. 내가 과연 취직됐는지 아니면 취직 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북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더니 급히 방을 나가기도 했다. 나는 그 뒤에 대고 신분증도 안 주고 어디? 하고 속으로 묻기도 했다.
행정 실 직원이 안내한 또 다른 방은 내가 소속될 팀의 팀장 방이었다. 그 방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분이 자기를 팀장이라고 소개했다. 그 팀장의 다음 말에서 나는 환성을 질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북한 출신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현직이 아니라 북한에서의 전직으로 자신들을 소개하는 그 분들 앞에서 나는 고향사람들을 만난 듯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안가에서 나와 보름 동안 홀로 지내며 쌓였던 외로움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반가움의 자리이기도 했다.
그 분들도 고향소식이 그리웠던지 내가 탈북하기 전 북한 상황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대화를 주고 받고 나서 행정 실 직원과 함께 내가 일하게 될 사무실로 이동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사무실인 줄 알았는데 내가 뭐라고 개인 사무실을 주었다. 나만의 특혜가 아니라 연구소 내 모든 연구원들이 개인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책장이며 컴퓨터, 소파, 대형TV에 이르기까지 내 개인 사무실의 물건들은 북한 어느 간부사무실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급들이었다. 내가 들렸던 연구소 소장 방이나 팀장방과 별반 차이가 없어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연구소로 오는 차 안에서 형사가 연구소 직원이면 신분상승이나 같다고 했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북한 팀 선배님들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점심밥을 먹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정문 밖을 나설 때에야 나는 식권이 아니라 밖의 음식점에서 돈 주고 점심을 사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점심 이후에도 우리는 거의 두 시간 넘게 북한 이야기로 한담을 나누었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오후 2시였다. 행정 실에 전화로 퇴근시간이 몇 시냐고 물었더니 6시라고 했다. 그때까지 4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조급해졌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저녁 총화시간 때 팀장으로부터 비판 받을 수 있어서였다. 젊은 놈이 첫 출근부터 건달 부린다고 평도 안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6시가 가까워지도록 누구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로 물었더니 웃음소리부터 들렸다. "여기는 북한 아니야" 팀장의 그 말 또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떻게 출근했는데 조회가 없고, 퇴근해야 하는데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총화가 없단 말인가? 연구소 간부들은 왜 나를 통제 안 하나? 그들의 직무유기가 불법이 아닌가? 나는 퇴근길에서야 선배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북한의 직장은 통제와 감시로 일관된 조직생활이라면 남한의 직장은 자율성의 원칙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조직문화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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