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출퇴근한지 한 달이 됐다. 그 한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는 연단 위에 올라선 연구소 간부들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생활총화도, 강연회도, 월간 모임도 없는 남한의 직장생활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끔 점심을 사주거나 식사 후 체육시간에나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하는 말들도 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퇴근 후에 혼자 밥 먹을 때 주로 뭘 먹는지, 운동을 하루에 몇 시간 하는지 등 일상생활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통제가 전혀 없는 남한의 직장생활이 적응되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일부러 찾아가 그 이유를 따져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도대체 뭘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특별한 교육조차 없었다. 같은 팀에 근무하는 선배님들이 이렇게 쓰면 된다는 훈시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행정 실에서 전화가 왔다. 월급을 줘야 하는데 현금으로 달라는지, 아니면 개인통장으로 넣어달라는지 물어보는 전화였다. 나는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 내가 받는 첫 월급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월급 명세서에 사인을 하고 두터운 돈 봉투를 받아 쥔 다음 내 사무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봉투를 펼쳐보던 나는 놀랐다. 320만원이었던 것이다. 미국 달러로 대충 계산해봐도 3,200달러나 됐다.
나는 믿기질 않았다. 연구소에 취직한 첫 달에는 업무 파악 차원에서 그냥 빈둥댔던 나였다. 그렇다고 생활총화나 강연회가 있어서 그런 조직생활에 열심히 참가한 것도 아니다. 그냥 제 시간에 맞춰 출근했다가 저녁 6시만 되면 퇴근하는 것이 전부였다. 지각한 날도 몇 번이나 됐다. 출근했다가 팀장에게 개인사정 설명을 하고 집으로 간 적도 몇 번이나 됐다. 그런데 320만원이라니! 왜?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알고 있었던 바로는 2004년 초까지 북한의 인민무력부장 월급은 2만원이다. 미국 환율로 계산해 보면 20달러 정도이다. 물론 월급이 아니라 뇌물과 정상적인 체제 공급으로 사는 북한 간부들이다. 그러나 그 정상 위에 오를 때까지 바친 충성의 인권비는 사적 소유로 남는 것이 아니다. 정권의 점유물로 허공에 유실되고 본인에게 정작 남는 것은 충신이라는 허망한 딱지에 덧칠하는 색칠 같은 것뿐이다.
그 충신의 명예란 것도 독재의 멸망과 함께 사라질 한갓 먼지 같은 것이어서 결국 북한 정권이 주는 대가란 치욕으로 돌아오고 저주로 버림받을 그 크기와 무게인 것이다.
그런데 나의 월급은 다르다. 내 것이고 내 행복의 밑천이었다. 정권이 부여하는 충신이라는 또 다른 별도의 전제가 없이도 내가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는 부의 계산이었고 답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서 살았던 내 삶의 인권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체제를 무료교육, 무상치료, 세금 없는 복지의 낙원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체제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복된 삶이라고 강요했다. 월급이라고 해 봤자 고작 배급식량과 공급물자들을 사는데 필요한 영수증 수준의 기초생활비였다. 그렇듯 북한 정권의 인권비란 나의 인권과 능력의 가치만큼 지불해주는 평가의 금액이 아니라 충성유도와 전체주의 차원에서 일괄 지원되는 공급물자였다.
1일 공급, 3일 공급, 주 공급, 월 공급으로 구분하여 그 등급에 따라 인격의 순위를 정했고, 그렇게 갈라진 계층의 우선 순위대로 차별적 우대와 특혜를 몰아주었다. 그것마저 사소한 변심을 품을 경우 목숨까지 철저히 빼앗아가는 정권의 소유물이어서 북한에선 누구나 월급의 작은 가치와 소유권마저 상실 당한 공동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내가 받은 첫 월급인 320만원, 그것은 결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나의 자유와 인권의 첫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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