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휴대폰을 샀다. 특별히 누구와 통화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휴대폰을 소유한다는 자체가 내가 한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는 것 같아서였다. 나에게도 전화 올 사람이 있고, 또 내가 전화 할 곳이 있다는 것, 그렇게 대화를 하고, 인연을 갖고, 일이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휴대폰은 내가 만지지 않으면 주머니에서 꺼낼 일이 전혀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고장 났는지 의심될 정도로 하루 종일 벨 소리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어쩌다 신호가 와도 잘 못 걸려온 허무맹랑한 전화일 뿐이었다. 그 휴대폰 속에서 부르는 내 이름을 들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태어나 이름을 가지고 말과 글을 배우며 얼굴과 정을 하나하나 익히는 깨달음의 삶, 경험의 삶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데 상대가 없고, 너무도 다른 이질감에 아무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공허의 삶, 이탈의 삶으로 전락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마치도 휴대폰이 새롭게 태어난 생명처럼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일까? 웬 일일까? 기다리던 울림인데도 정작 부르는 소리에 그 생각부터 하게 되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이나 쓸쓸하고 또 소심하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휴대폰 속의 목소리는 남자였다.
내 이름을 부르며 번호가 맞는가 물어보기까지 했다. "네, 맞습니다." 상대방을 확인하려는 전화 속의 질문보다 그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더욱 의문스럽게 느껴졌다. 금방 내 귀로 잘 못 들었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모 월간잡지사의 대표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갑자기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 분의 유명한 이름을 북한에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전 부에서 근무할 때였다. 김정일은 남한의 반(反)북(北) 인물 몇 사람을 직접 거론하며 일제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 비교해서 대남심리전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주었었다. 같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조차 내가 탈북자인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내 이름까지 알 수 있는지 도저히 믿겨지질 않았다. 역시 김정일을 노엽게 한 "을사오적"이 다르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날 오후 나는 그 분의 사무실에서 2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분이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북한 통전 부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 내가 탈북한 2004년의 북한상황도 그 분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만큼 통일과 북한인권에 대한 고민이 남달랐던 분이시었다.
내 전화를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는 당신 번호를 알고 있던 몇 사람 중 한 명이 꼭 만나보라며 추천했다고만 짧게 말씀하셨다. 인터뷰가 끝난 뒤였다. 그분은 나에게 종이봉투와 노트북을 주시었다. 원래 원고료는 글이 실린 후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서울에 정착한지 며칠 안 됐으니 보태 쓰라는 것이다. 종이봉투에는 200만원이 들어있었다. 미국 화폐로 계산하면 2000 달러인 셈이었다. 큰 돈이었지만 나는 거절했다. 대신 좋은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 분은 자유시장 국가에선 돈을 가지는 것이 힘이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남한에서 만난 첫 인연인데 돈 거래로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고집했다. 솔직히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결심으로 시작해야 하는 그때의 나에게 돈보다 더 절실한 것은 묻고 싶을 때 물을 수 있는 사람, 고민이 생겼을 때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나이가 엇비슷하면 편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으신 것만큼 그 분의 조언과 관심도 깊을 것이란 생각에 간절히 부탁 드렸다.
정착의 첫 걸음마를 떼던 그때부터 이 글을 쓰는 오늘날까지도 그 분은 나의 지원자, 후원자이시다. 200만원이 아니라 곱절로 그 이상의 가치들과 귀중한 사람들을 나에게 끊임없이 이어주신 은인이시다. 나는 그때 단순히 외로움의 호소로 책에서 본 글귀를 그대로 반복하는 수준에서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나에게 북한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진리를 처음으로 가르쳐 준 인생의 스승이시었다. 그 진리는 사람끼리 만나고, 사람끼리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인 "대인관계", 그 네 글자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