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월급인 320만원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생에 처음으로 많은 돈을, 그것도 월급으로 받은 나여서 통쾌하게 쓰고 싶었다, 뭘 살까? 고민하던 나는 우선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나처럼 첫 월급을 받은 사람들의 좋은 선례가 있을 듯싶었다. 대부분 효도나 사랑, 혹은 회사 동료들과의 우의를 위해 첫 월급의 반을 썼다는 내용들이었다.
갑자기 고향생각이 났다. 그들을 위해 한 푼도 쓸 수 없다는 절망감에 돈이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했다. 효도가 있고, 사랑이 있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남북분단의 현실이 다시금 아프게 실감됐다. 회사 선배들은 혼자 산다고 돈을 막 써 선 안 된다며 반드시 은행에 차곡차곡 저축하라고 조언했다.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을 듯싶었다.
다음날 320만원을 고스란히 나의 계좌에 넣으며 갖는 쓸쓸함과 외로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돈이란 내 필요의 범위이자 한계인데 한 푼도 쓸 수 없다는 나의 공허한 처지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회사 선배가 차라리 차를 사라고 권고했다. 어차피 생활하자면 자가용 차가 있어야 하는데 택시 값으로 소비할 필요가 있냐면서 말이다. 320만원이면 웬만한 중고차를 살 수 있다고 지인을 소개해주기까지 했다. 비록 중고라도 한 달 월급으로 자가용 승용차를 살 수 있다는 남한의 부유한 현실에 나는 크게 감탄했다.
그 날 퇴근 후 회사 선배가 소개해 준 중고차 전문 시장을 찾아갔을 때는 더 크게 놀랐다.
손님들을 기다리는 수많은 중고차들이 김일성 광장만한 넓은 공간에 빼곡히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한 업체만이 아니라 중고차 장사를 하는 여러 회사들의 차량이 모두 모여 서로 경쟁하는 현장이어서 가격 흥정도 여간만 쉽지 않았다. 나는 300만원으로 현대에서 생산한 '소나타 2'를 골랐다.
차 성능을 직접 확인해보라며 차 열쇠를 주었을 때 나는 대뜸 운전할 줄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장도 놀랐고,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차를 살 수 있다는 그의 말에 나 또한 놀랐다. 북한 같았으면 차를 구입할 정도의 재력가라면 운전 면허증도 뇌물로 만들 수 있는데 남들과 똑같이 운전학원 과정을 거쳐 시험까지 통과해야 한다는 설명에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3일 후 나는 새벽과 야간에 한 시간 반씩 운전교육을 일주일 동안 받는 운전학원에 입학했다. 학생들의 편리를 위해 통근버스가 운영되고, 별다른 감시나 통제가 없이도 자동적으로 등교를 체크하는 자동지문 기계라던가, 또한 특별한 우대가 없이 남들과 똑같이 공평하게 우대해주는 운전학원의 제도는 나를 매 순간 감동받게 했다. 도로주행 연습도 강사가 앉는 조수석에 급정거하는 장치가 따로 있어 사고 날 염려가 전혀 없었다.
일주일 후 나는 운전면허증을 받게 됐다. 내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딴 기술이고 자격증이어서 자신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 날 중으로 중고 차 시장에 들려 자가용 차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가슴은 막 흥분됐다. 내가 손수 이루어낸 꿈의 성취 같아서였다. 노력한 것만큼 대가를 지불하고, 또 그 권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남한의 자유에 감사했다.
그 첫 운전은 시종일관 즐거운 것만도 아니었다. 운전미숙으로 다른 차와 접촉사고를 낼뻔한 순간의 긴장과 그 뒤의 불안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서울거리를 누비며 곰곰이 생각했다. 운전대를 잘 못 돌리면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맞게 되는 것처럼 주위와 환경요인에 따라 내 운명의 방향을 항상 옳게 정하는 것이 생존의 능력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이왕이면 남보다 빨리 달려 볼 의욕이 넘쳤다. 그래서 집으로 향하던 목적지를 바꿔 고속도로 위로 올라섰다. 밟으면 밟을 수록 빨리 가는 나의 차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때로부터 한 달 뒤였다. 집으로 속도위반 벌금딱지가 5장이나 날아왔다. 고속도로에 속도위반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교통법규를 어겼을 경우 벌금을 물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나는 그때 또 한번 남한의 현실을 알게 됐다. 자유의 경쟁에도 나름의 질서와 윤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