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1)

한 탈북민의 집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면서 캐나다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탈북민들.
한 탈북민의 집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면서 캐나다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탈북민들. (RFA PHOTO/장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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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관심이 높아가는 북한의 인권문제와 그 활동소식을 전하는 캐나다는 지금, 토론토에서 장소연 기자가 전합니다.

요즈음은 한반도가 한창 봄빛에 무르익고 있지만 이곳 토론토는 아직도 초봄으로 쌀쌀한 기운이 가셔지지 않고 있는데요.

지난 일요일 토론토 다운타운 중국 차 집에서 만난 탈북민 김영희씨는 48세로 중년을 달리고 있는 나이에도 한창 피어나는 처녀같이 한껏 활력이 넘쳐 보였습니다.

(현장 음)

"그거야 상상도 못하지요, 여기 생활은 북한하고 비교조차도 안되지요. 벌어도 내가 노력한 것만큼 대가가 오지요".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2009년 북한을 탈출해 이곳 캐나다에 살고 있는 김영희씨를 만나 어떻게 되어 이곳 캐나다 까지 오게 되었는지 들어봅니다.

김영희: 내가 먹지 못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노력을 하면 그 만큼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북한은 아무리 해도 안되지 않아요.

김영희씨는 북한에 있을 때 김책시에서 살았습니다. 예전에 성진이라고 불리던 곳을 한국 전쟁 당시 전선사령관을 하던 김 책의 이름을 따서 김책시로 바꾸었는데요. 김책시는 북한에서도 가난한 곳으로 소문나 있는 고장입니다. 김책 제철소가 있는 이곳에서는 철 이외는 생산품이 별로 나지 않아 대부분의 김책시 사람들은 북한정부에 의지 할 수밖에 없고 배급을 주지 않으면 그냥 꼼짝 없이 굶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그런 속에서도 김영희씨의 어머니는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김씨의 집은 항상 쌀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고난의 행군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장사를 하는 것 때문에 김씨의 어머니는 항상 비판대상이 되군 했는데요.

김영희 : 원래부터 엄마는 장사를 했거든요. 그런데 북한에는 우리 자랄 때랑 보면 장사를 못하게 했잖아요. 얼마나 우리 엄마는 동네 욕 먹으면서 그랬는데요. 그래도 장사를 했어요. 비판무대에 오르면서도 , 막 안전 원들이 집에 들이 닥치고 그래도 그냥 장사를 한 거지요. 우리 친정엄마는 항상 집에 식량이 몇 백 킬로씩 있어야 마음을 놓거든요. 그런데 고난의 행군이 오니까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데요. 자식들 다 살렸지요. 내가 고난의 행군시기 시집을 갔지만 그래도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다 살았지 않아요. 북한에서 이런 말이 있어요. 백성은 무능하고 못살아야 나를 따른다, 그래서 당에서 뭔가 조금 주기만 하면 그게 그렇게 고맙다고 감사해하고 막 따른다 그런 이치인 거지요.

김영희씨는 그 어려운 속에서도 자신들의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북한이라는 나라를 믿지 않고 장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김영희: 아무리 노력을 해도 뭔가 안되고 장사를 해도 안되니까 이게 아닌 거지요. 개인이 잘살면 북한은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화폐 개혁을 하지 않으면 , 비사회적으로 돈을 벌었다고 해서 압수를 하지 않으면, 저는 그것을 현실로 봤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는 뭔가 이뤄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느꼈기 때문에 내가 나온 것이지요.

김씨의 외할아버지는 해방되기 전 황해도에서 목사를 했던 지식인이었다고 하는데요. 이 일로 해방이 되고 김일성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 반동분자의 낙인이 찍혀 멀리 살던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김씨의 아버지 역시 부유한 농가 출신으로 결국 청산대상으로 추방되어 김책시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활배경은 김씨의 부모들이 북한정권을 믿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게 했는데요. 이런 가족의 삶의 신조는 가장 어려울 때도 굶어 죽지 않고 가정을 버틸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온갖 수모를 받으면서 장사를 해 가족을 먹여 살리려 애썼지만 아무리 해도 북한사회에서는 희망이 없음을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점점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우기 시작했는데요. 주변에서 탈 북 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한국물건이 장마당에 많아지면서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마침내 김씨의 가족은 2009년 북한에서 떠나게 되는데요. 사람다운 삶을 찾으려는 김영희씨의 여정,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보내드립니다.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장소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