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관심이 높아가는 북한의 인권문제와 그 활동소식을 전하는 캐나다는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서 장소연 기잡니다.
최근 캐나다에 정착한 탈북인들이 탈북인 총연합회를 중심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탈북민들의 정체성을 알리며 다양한 활동을 벌여가고 있는데요, 탈북민 세미나, 지역사회 봉사 등 캐나다 한인단체들과도 긴밀히 협력해나가고 있습니다. 또 한인회에서 진행하는 각종행사들과 지역정치인들과의 만남을 넓혀가면서 캐나다 탈북민들의 상황을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요.
이런 활동의 중심에는 캐나다 탈북인 총연합회 김록봉회장의 남모르는 고심과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김록봉 회장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북한을 떠나온 탈북민들은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한 생을 전해도 못다 할 기막힌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데요. 북한과 중국, 한국 그리고 이곳 캐나다까지, 김록봉 회장에게도 많은 사연들이 있었고 그것이 오늘 이렇게 탈북인 단체를 사심 없이 이끌고 있는 원동력입니다.
올해 35살인 김록봉회장은 탈북회 회원들 중에는 아주 젊은 층에 속합니다. 고향이 북한 청진인 그의 아버지는 평양의 유명한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는데요. 1970년, 80년대 평양에서 출신성분이 안 좋은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추방하면서 김회장의 아버지도 지방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남한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중국출신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근 10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가거나 지방으로 추방되거나 했다는 데요.
청진에서 그의 아버지는 또 더 깊은 오지인 강원도 문천 산골로 가게 됩니다. 그 산골에서 보일러공으로 일하게 된 그의 아버지는 평생 철학과 교수였다는 말을 다신 꺼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회장은 산골에서 성분 나쁜 집안의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유난히 책이 많았는데 그 책을 하루 종일 읽으면서 지내는 것이 그의 유일 한 낙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 추방 내려온 그의 아버지가 간직한 평생의 재산이었을 지도 모르는 책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공부에 취미가 있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는데요.
중학교에 가서도 그는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한 수학선생님의 지도하에 몇 달 동안 공부를 한 그는 단연 강원도에서 진행된 수학올림픽 경기에서 일등을 하게 되는데요. 이를 계기로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전국적으로 수재들만 간다는 평성 리과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그렇게 산골에서 인재가 배출되는 경사가 났고 김회장은 대학 물리학과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공부를 시작해서 2년 결국 그렇게 좋아했던 공부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또한 그가 북한이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인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공부가 아니라 오직 죽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자리잡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삽시간에 가장이 되게 된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골동품 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중국을 넘나 들면서 점차 장사를 넓혀가기 시작했는데요. 결국 국경을 넘다가 보위부에 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위기 일발의 순간, 그는 보위 원의 눈을 피해 도망치게 되고 몸이 묶인 채로 얼음이 칼같이 몸을 덮치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가 닿게 됩니다.
그런데 중국 쪽에서는 또 공안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그가 강에 닿자 바로 추격하는 공안들을 따돌리느라 절벽에 붙어 올라가게 됩니다.
그 절벽에 올라서서 간신히 추격을 피하게 된 김회장은 다시는 북한으로 건너가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는 데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지금 진행중인 우리 탈북민들의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김회장이 어떻게 캐나다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지금 이곳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장소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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