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관심이 높아가는 북한의 인권문제와 그 활동소식을 전하는 캐나다는 지금, 토론토에서 장소연기자가 전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캐나다에 정착한지 이제 3년되는 윤용수씨가 건설 일을 하면서 한 달에 수천 달러씩 벌어 북한에도 보내주고 또 몇 십만 달러 하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 전해드렸는데요. 윤용수씨의 캐나다에서의 생활, 오늘 이 시간에도 전해드립니다.
윤용수: 우리는 건물 하나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하니까, 지금 하는 일도 한 2년 반 과제거든요. 그러니까 한자리에서 계속 일하면 되요. 안에서 일하니까 겨울에도 히터 켜놓고 하고…
윤씨는 혼자 힘으로, 혹은 어깨 너머로 숙련공들이 하는 플라스터 일을 열심히 배웠는데, 6개월 동안은 거의 월급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술을 배운 덕에 오늘은 캐나다 건설회사에서 당당하게 플라스터 기술자로 일하게 된 것입니다. 플라스터란 북한에서 말하는 미장공과 비슷한 말인데, 캐나다에서도 상당히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직종입니다.
윤용수씨가 캐나다에서 살면서 항상 북한의 최고 간부도 부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몇 천 달러의 돈을 매달 버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인데요. 윤용수씨가 북한에서 첫 번째로 가장 억울하게 생각했던 점, 바로 표현의 자유였습니다.
윤용수: 북한은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말을 내 뱉지 못해요. 그렇게 했다가는 바로 감옥에 가지요.
아무리 권력이 있고 돈이 있다 해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감옥에 가고 사형까지 당하는 북한의 간부들이 이제는 불쌍하기 그지 없다고 말합니다. 윤용수씨 가족이 그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한데요.
윤용수: 저의 아버지가 (평양에서) 지배인 했었는데 큰 아버지 때문에 지방에 쫓겨나왔어요. 그때 당시 김정일이 처음 당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할 때예요. 67년도에, 그때 김일성 우상화를 시작했어요. 그때 김일성 가계에 대해서 일체 한마디라도 하는 것은 숙청대상이고 제거 대상이었어요. 큰 아버지가 정무원 내각에서 과장급으로 일했는데. 그러다가 어떻게 술상에서 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얼마 안 있어서 민족보위성에 불려갔고 그 이후로는 행방자체가 없어요. 문건 자체가 없어요. 그 사람이라는 형체를 아예 없애버린 거예요. 그때 신분자체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았어요. 요덕 수용소에도 많이 가고..
그렇게 윤용수씨의 가족은 물론 삼촌, 고모 등 형제 4가족이 모두 지방으로 추방 되었습니다.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윤씨는 추방된 지방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죄인 가족 취급을 받았고 정상적인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윤용수: 북한에서는 남자라면 입당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족 같은 것은 입당 자체가 힘들어요.
큰 아버지의 말 한마디 때문에 온 4형제 가족이 고초를 겪어야 했던 사연을 뼈아프게 새기고 있는 용수씨, 지금 이곳에서 누리는 표현의 자유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합니다.
윤용수: 여기 캐나다는 누구나 마음이 편한 곳 이예요. 누구를 터치(간섭)하는 것이 없고 그저 오직 나만 기술을 잘 배워서 이사회에 적응만 잘하면은 누구 생각할 것 없이 정말 편안하게 살수 있는 곳 이예요.
윤씨는 올해 초 자가용차를 한대 구입했는데요. 자신만의 차를 가지고 어디든 갈수 있다는 것, 꿈꾸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윤용수: 엄청 좋지요, 진짜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아요. 진짜 내가 차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마음상 틀리더라고요. 진짜 내가 죽기 전에 타보겠냐 하고 생각했던 그게 현실이 되었으니까, 북한에 있으면 이런 생각조차도 못할 거 잖아요.
자가용은 커녕 , 말할 권리, 마음 대로 먹을 권리조차 없는 북한에 대해 윤용수씨는 온 나라가 "철창 없는 감옥" 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그 감옥에서 하루빨리 그의 부모와 형제들을 구원하는 것이 지금 그가 가장 바라는 소원입니다.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장소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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